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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까지 존재했던 한민족 고대사서 들이 지금 전해지지 않으니
    고대 중국 문헌의 단편적인 내용으로 동이족 선조들의 찬란했던 역사를 추론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고기》,《삼한고기》, 본국고기(고구려 백제)》,《신라고기》,《백제고기》,《구삼국사》 등 
우리나라의 고대 사서들이 남아있지 않고 전부 실전되어서 존재하지 않으니 통탄하고 통곡할 일이다

 

■ 사마천 사기에 따르면 황제 헌원은 구려(동이) 치우천왕의 신하였다

 

1) 치우천왕,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이 활동하던 시대(古)에 치우천왕이 천자(天子)였다고 한나라 학자 응소가 말했다

2) 황제는 섬서성 지역을 관할 하던 염제 신농씨의 신하였는데 염제 신농을 무찌르고 섬서성을 차지했지만

치우와의 탁록 전투에서 패한 것으로 보이며, 제후들에게 쫓기어 도망다니느라 편히 지낸적이 없었다(사기 오제본기)

3) 황제 헌원이 천자가 되려다 치우에게 패하여 수염이 뽑히고 활이 땅에 떨어져 있었는데 황제헌원을 찾을 수가 없었지만

    섬서성 북쪽 깊은 산골짝이(延安市 黃陵縣)에 신하들이 황제능을 만들어 주었다(사기 효문본기)

4) 황제가 치우에게 승리하여 천자가 되었다면 섬서성 북쪽의 깊은 산꼴짜기에 황제능을 만들 이유가 없을 것이다

5) 치우천왕이 동이족인 소호금천씨를 섬서성 서북부의 유웅국에 보내 황제 헌원의 유웅국을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소호금천씨는 황제 헌원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다) 

 

☞ 『 < 사마천 사기(史記) 卷一 五帝本紀 第一 황제(黃帝) >』
이에 헌원은 무기 사용법을 익히고, 〔신농씨에게〕 조공하지 않는 자들을 정벌하니, 제후들이 모두 와서 〔신농씨에게〕 복종하였다. 그러나 치우(蚩尤)는 가장 포악하여 정벌할 수가 없었다.
※ 남조 송나라 배인의 집해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치우는 옛 천자이다.
당나라 장수절의 정의 : 『용어하도(龍魚河圖)』에서 말하기를 “황제가 섭정할 때, 치우에게는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짐승의 몸을 하고서 사람의 말을 하였으며, 구리로 된 머리에 철로 된 이마를 갖고 있었고, 모래와 돌을 먹었으며,
 병장기로 칼과 창, 큰 활을 만들니 그위세가 천하에 떨쳤다. 공안국(孔安國) 말하길 “「구려(九黎)의 임금을 치우라 부른다.」는 것이 이것이다.

 
...헌원은 이내 덕을 닦고 군대를 정돈하고,염제와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싸웠고,세 번이나 싸운 뒤에야 그 뜻을 이루었다. 

...(치우와의 탁록전투에서 승리한 후)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황제가 쫓아가 정벌하고, 평정한 후에는 떠났다, 산을 파서 길을 뚫느라, (황제헌원은) 편히 지낸 적이 없었다.

 

[원문] 於是軒轅乃習用干戈, 以征不享, 諸侯咸來賓從. 而蚩尤最爲暴, 莫能伐. 
集解】應劭曰:「蚩尤, 古天子.」 
正義】龍魚河圖云 : 「黃帝攝政, 有蚩尤兄弟八十一人, 並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石子, 造立兵仗刀戟大弩, 威振天下. 孔安國曰:「九黎君號蚩尤.」是也.
... 軒轅乃修德振兵, 以與炎帝戰於阪泉之野, 三戰然後得其志.

... 天下有不順者, 黃帝從而征之, 平者去之. 披山通道, 未嘗寧居.

 

☞ 『 < 사마천 사기(史記) 卷十二 효무본기(孝武本紀)>
황제가 용을 올라타자 신하들과 후궁들 70여 명도 뒤따라 용을 탔고, 용은 바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미처 오르지 못한 나머지 지위가 낮은 신하들이 모두 용의 수염을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용의 수염이 빠졌으며 황제의 활도 떨어졌다. 백성들은 황제(黃帝)가 승천하는 것을 우러러 보다가 활과 용의 수염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하였다.

 
[원문] 黃帝上騎, 群臣後宮從上龍七十餘人, 乃上去. 餘小臣不得上, 乃悉持龍髯, 龍髯拔, 墮黃帝之弓.
百姓仰望黃帝既上天, 乃抱其弓與龍胡髯號.

 

■ 오월춘추에 따르면 북쪽의 동이단군 조선의 사신으로부터 우임금이
금간(金簡)과 옥자(玉字)를 받아서 치수에 성공하여 하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다

산해경 해내경(海內經)에서 '중국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있어 이르기를 조선천독이라 했으니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현이(玄夷 = 북쪽에 있는 동이)의 창해(蒼水 = 발해) 사자란

단군조선의 사자로 추정할 수 있고, 우임금이 금간(金簡)과 옥자(玉字)를 단군조선에게 하사 받아서

하나라 우임금이 치수(通水, 통수)의 이치를 알고 치수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 『 <오월춘추(吳越春秋) 월왕(越王) 무여(無余) 외전(外傳) 제육(第六)>

우(禹)가 이에 동쪽으로 순행하여 형악(衡嶽)에 올라 백마(白馬)의 피로 제사를 지냈다......
꿈에서 붉게 수놓은 옷을 입은 남자를 보았는데 자칭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라 하였다.
우(禹)는 물러나와 삼개월동안 목욕재계하였다. 경자일(庚子日)에 완위산(宛委山)에 올라 금간(金簡)의 책을 발견하매
금간(金簡)과 옥자(玉字)로 되어 있었으니 치수(通水, 통수)의 이치를 얻은 것이었다.
※주)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 : 창수는 발해 모퉁이고, 현이는 북쪽에 있는 동이이니
현이의 창수사자란 산해경에 나오는 동해의 안쪽, 북해(발해)의 모퉁이에 있는 단군조선에서 온 사자로 보인다


[원문] 禹乃東巡 登衡嶽 血白馬以祭...因夢見赤繡衣男子 自稱玄夷蒼水使者

 ...禹退又齊三月 庚子登宛委山 發金簡之書 案金簡玉字 得通水之理.

 

■ 사마천 사기에 따르면 주나라는 단군조선(식신)의 신하였다

1) 주나라 시조가 후직인데, 제곡 고신씨의 아들이다 제곡 고신은 동이족인 소호금천씨의 손자다

     따라서 주나라 시조인 후직이 동이족이니 주나라 왕족도 동이족이다

2) 주나라 2대 성왕 때, 식신(조선, 단군조선)의 사절이 방문하자,  식신의 명령에 대해  재물을 바친다는

    회식신지명(賄息愼之命)의 시를 짓어서 식신(단군)에게 받쳤다(사기 주본기)

    포악한 은나라 주왕을 징벌하고 반란에 참여한 동이를 정벌하는 하라는 내용이 식신(단군)의 명령으로 보인다

3) 주나라 성왕때에 은나라 주왕의 아들 무경과 동이가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을 일으킨 동이는 정벌하되

     북쪽으로는 식신인 단군조선의 영토가 시작되는 산동성 북부의 무체(無棣) 지역 이북은 침범하지 말라고

     제나라 태공(강태공)에게 명령했다(사기 제태공세가)

4) 산융과 고죽국을 정벌한 제나라 환공 시대에도 식신인 단군조선 영토인 산동성 북부의 무체(無棣) 지역 이북은

침범하지 말라는 주 성왕의 명령은 지켜진 것으로 보인다(사기 제태공세가)

(사기 제태공세가에는 제환공이 고죽국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고죽국에 이르러 회군했다고 한다)

 

※ 주) 주나라, 춘추시대, 전국시대, 진나라, 전한, 후한, 서진시대까지

중국 고대왕조는 북쪽으로 산동성 북부 무체(無棣) 이북 직역은 거의 침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서진 말부터 선비족이 중원 중심부로 진출한 5호 16국시대와 남북조시대부터 북방 한계선이 무너졌다

졸본부여를 세운 부족으로 보이는 선비족(졸본 부여족)은 고조선의 후예이기에 북방한계선을 지킬 의무가 없었다고 본다

 

☞ 『 < 사마천 사기(史記) 卷四 주본기(周本紀) 第四 성왕(成王)>
성왕(成王)이 (반란을 일으킨) 동이(東夷)를 모두 정벌한 후에, 식신息愼)이 와서 축하해 주니, 왕은 영백(榮伯)에게 명하여, 「회식신지명(賄息愼之命)」을 짓도록 하였다.
※주) 회식신지명이라 (포악한 은나라 주왕을 징벌하고 반란에 참여한 동이를 정벌하라는) 식신(단군)의 명령을

         완수하였기에, '식신(단군)의 명령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시'를 성왕이 짓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원문] 成王旣伐東夷, 息愼來賀, 王賜榮伯, 作賄息愼之命.

 
☞ 『<사마천 사기(史記) 卷三十二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제 태공(齊 太公)> 
주 성왕(成王)이 어릴 때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난을 일으키고 회이(淮夷)가 주나라를 배반하자 소강공(召康公)을 보내 태공에게 이렇게 명령하였다.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서쪽으로는 황하까지, 남쪽으로는 목릉(穆陵)까지, 북쪽으로는 무체(無棣) 지역까지  다섯 등급의 제후와 구주(九州)의 우두머리들이 죄과가 있으면 정벌하도록 하라.”

 

[원문] 及周成王少時, 管蔡作亂, 淮夷畔周, 乃使召康公命太公曰
「東至海, 西至河, 南至穆陵, 北至無棣, 五侯九伯, 實得征之.」

 
☞ 『<사마천 사기(史記) 卷三十二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제 환공(齊 桓公)>
산융(山戎)이 연(燕)나라를 공격하자 연나라는 제나라에 급히 알려왔다. 제 환공이 연나라를 구하러 나서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孤竹)에 이르러 회군했다.
... 제나라 대부 관중이 말하기를 “옛날 소강공(召康公)께서 우리 선군이신 태공께 이르기를, ‘다섯 등급의 제후와 구주의 우두머리들이 죄과가 있으면 그대가 정벌하여 주 왕실을 도우라’. 또한 우리 선군께서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서쪽으로는 황하까지, 남쪽으로는 목릉(穆陵)까지, 북쪽으로는 무체(無棣)지역까지 밟으라 하셨다.

 
[원문] 山戎伐燕, 燕告急於齊. 齊桓公救燕, 遂伐山戎, 至于孤竹而還.
... 管仲對曰 「昔召康公命我先君太公曰 『五侯九伯, 若實征之, 以夾輔周室.』 

賜我先君履, 東至海, 西至河, 南至穆陵, 北至無棣.

 

 ■ 후한서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한나라(전한, 후한)은 부여(졸본부여)의 신하였다

1) 후한시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옥갑을 (졸본)부여왕의 장례를 위해 현도군에 항상 한나라가 준비했다는 것은

한나라가 (졸본)부여 신하라고 볼 충분한 근거가 된다

2) 후한서 동이열전과 정사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부여 위치는 동부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명신화를 기록한 것으로 판단하면

옥갑을 항상 준비하여 한나라가 신하의 책무를 다한 부여는 동명왕의 졸본부여로 추정할 수 있다(후한서, 정사 삼국지)

3) 부여왕의 장사에 옥갑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나라 조정은 현도군에 옥갑을 항상 준비해 두었다(정사 삼국지, 후한서)

왕의 장사에 사용하는 옷갑을 옥이(玉衣)라고 하는데, 옥은 지금도 값이 비싼 보석이며, 옥이를 제작하는 일은 

엄청난 비용,시간,노력이 필요한 일이었기에 국가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후한시대에는 오직 황제만이 옥갑을 사용하였다 

4)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의 만성한묘(滿城漢墓)에서 전한시대 옥갑인 금루옥의(金縷玉衣)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사마천사기의 지리적인 고찰에 따르면 보정시는 졸본부여의 홀승골성으로 추정되는 장소이기에

만성한묘(滿城漢墓)는 졸본부여 동명왕의 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중국은 당연히 만성한묘滿城漢墓가 전한시대 중산국의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묘라고 주장한다)

5) 졸본부여 동명왕의 왕통은 주몽의 고구려로 이어지지만 북부여 계열의 유리왕이 등극하면서 동명왕의 후손인 비류와 온조는 동명왕(졸본부여)의 왕통을 계승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독립하게 되는데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게 된다

맏이인 비류는 역사속으로 사라지는데 후한서와 정사삼국지에 등장하는 부여는 비류 후손의 비류백제일 가능성이 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 장수는  한무제가 대부분 처형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따라서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나서 한나라가 북부여를 공격하다가  졸본부여 동명왕에게 대패해서

졸본부여의 영원한 신하가 될 것을 한나라 한무제가 약속했다면 한나라 장수들이 처형된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

 

☞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부여(夫餘) >
부여 왕의 장사에는 옥갑을 사용하므로, 한나라 조정에서는 언제나 옥갑을 미리 현도군에 갖다 두어, (부여)왕이 죽으면 그 옥갑을 취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

 
[원문] 其王葬用玉匣, 漢朝常豫以玉匣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焉.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
한나라 때에는 부여왕의 장례에 옥갑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한나라가 옥갑을] 현도군에 미리 준비해 주었다
[부여]왕이 죽으면 [현도군에 있는] 옥갑을 가져다 장사지냈다. 공손연이 주살된 뒤에도 현도군의 창고에는 준비된 옥갑 하나가 남아 있었다.

 
[원문] 漢時, 夫餘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 公孫淵伏誅, 玄菟庫猶有玉匣一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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