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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좌전에 따르면 춘추시대 연나라 위치는
   한나라 동군(東郡) 연현(燕縣) 이니 지금의 하남성 황하 근처의 연진현(延津縣)이다

※주) 1) BC 1000년 경의 초기 연(燕) 나라는 하남성 연진현(연현, 燕縣)에 있었는데
2) 춘추시대(BC 550경)에 한단시 동쪽 부근의 하역수(下易水)로 도성을 옮겼고
3) 전국시대(BC300년 경)에 요임금 후손의 봉지인 계(薊, 석가장시 남쪽)를 차지하여 연나라로 삼았다

 

1) 주본기에 주나라 무왕이 연나라 시조 소공석을 연(燕)에 봉했고, 요임금의 후손을 계(薊)에 봉했다고 한다

    연소공세가에는 주무왕이 연나라 시조 소공석을 북연(北燕)에 봉했다고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사마천 사기에는 북연(北燕)의 기록이 없으니

     연소공세가에서 연(燕)을 북연(北燕)으로 사마천이 잘못 표현한 것으로 본다

    < 연燕은 지명으로 하남성 황하근처 한나라 동군東郡지역의 燕땅(연현, 燕縣)이다 >

 

2) 춘추좌전에 따르면 춘추시대 연나라 위치는 한나라 동군(東郡) 연현(燕縣)이니

    한서지리지에 의해 하남성 황하근처의 연진현(延津縣) 교행장촌(喬杏庄村)이 춘추시대 연나라 위치다

 

※ 주) 춘추시대 말에 하남성 황하근처의 연나라가 하북성 남부(역易, 하역수下易水 근처)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춘추시대 하남성 연나라를 남연(南燕),
         춘추시대 말 하북성 남부의 연나라를 북연(北燕)으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한다

 

☞ 『 < 사마천 사기(史記) 卷四 주본기(周本紀) >』

무왕은 고대의 성왕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요임금의 후손을 계(薊)에 봉했다.
그리고 공신과 모사를 봉했는데,..., 소공 석을 연(燕)에 봉했다.

  

  [원문] 武王追思先聖王, ..., 堯之後於薊. 於是封功臣謀士,..., 封召公奭於燕.

 

☞ 『 < 사마천 사기(史記) 卷三十四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

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키고 소공을 북연(北燕)에 봉했다.

※주) 사마천 사기에는 북연(北燕)의 기록이 없으니, 연(燕)을 북연(北燕)으로 사마천이 잘못 표현한 것으로 본다

 

[원문] 周武王之滅紂, 封召公於北燕.

 

☞ 『 < 춘추좌전(春秋左傳) 노나라 은공(隱公)  >』

노 은공 5년(BC 718) 정(鄭)나라가 위(衛)의 교외를 침공하여 동문의 전쟁을 보복하니 위(衛) 나라가 연(燕)의 군대를 거느리고 정(鄭)을 토벌하였다. [주注] 연(燕)은 남연국(南燕國)인데, 지금(후한)의 동군(東郡)의 연현(燕縣)이다

 

※주) 하남성 안양시의 위衛나라가 연(燕)의 군대를 거느리고 하남성 정주시의 정(鄭)나라를 토벌했으니
낙양에서 북쪽으로 700km정도의 1천 5백리 거리의 북경의 연나라가 될 수 없고

하남성 황하 근처에 춘추시대 연(燕)나가 있었기에 정나라가 연의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토벌할 수 있었다


※주) 황하지역인 연진현에 있었던 춘추시대 연나라를 남연국이라 부르는 중국 고대 학자들이 있다

후한 동군 연현(燕縣)은 전한의 동군 남연현(南燕縣)인데, 하남성 연진현(延津縣) 교행장촌(喬杏庄村) 일대다 

 

[원문] (魯)隱公 五年 鄭人侵衛牧 以報東門之役 衛人以燕師伐鄭 【注】南燕國,今東郡燕縣.

  

■ 춘추전국 시대 연나라는 
     하남성 황하 부근(연燕)에서 하북성 남부(역易) → 하북성 중부(계薊)로 도성을 옮겼다

 

1) 수경주 역수조에 따르면 춘추시대 말에 연나라가  하북성 남부(역易, 하역수下易水 근처)로  도성을 옮겼다

 

     -. 하북성 남부(역易, 하역수下易水 근처)로 도성을 옮기 시기는

         수경주 역수조에 따르면 연나라 24대 문공(BC 555 - 549) 시기다 (수경주 내용)

     -.  제나라와 진나라 사이에 끼여있던 연나라는
          BC 589년,BC 557년,BC 550년 진(晉)나라와 제(齊)나라가 전쟁을
 하니,
         전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안전한 하북성 남부(역易, 하역수下易水 근처)로 도성을 옮기게 된다(진세가 내용)

     -. 춘추좌전에는 BC544 ~ BC 530(15년) 기간에 북연(北燕)의 표현이 나타나는데

        하북성 남부로 도성을 옮긴 연나라(역易,하역수下易水 근처, 북연)와

        하남성 황하 근처의 도성을 옮기기 이전의 연나라(연燕, 남연)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본다

 

2) 한비자 유도편에 따르면 전국시대 연나라가 하북성 중부(계薊, 염철론의 험고인 계)로 도성을 옮겼다

 

    -. 연나라 소왕(BC312 - 279)이 염철론의 험고인 계(薊)를 나라로 삼고(도읍을 계로 옮기고)

        탁(涿)과 방성(方城)을 습격하고, 제(齊)나라를 멸할 정도로 해치고, 중산(中山)을 평정하였다(한비자 유도편)

    -. BC 314년 연나라 재상 자지의 전행으로 내분이 발생하고
        제나라가 연나라를 침공하여 연왕과 재상 자지, 연 태자가 사망하였고

         연나라는 거의 멸망의 수준에 이르렀다(조세가)

     -. BC 312년 조나라의 도움으로 한나라에서 귀국해서
        연나라 왕이 된 소왕은
염철론의 험고인 계(薊)로 도읍을 옮겨
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를 안정시켜서 연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조세가)

 

☞ 『 < 수경주(水經注) 「역수易水」 >』

[원문] 昔燕文公徙易 : 옛 연나라 문공(BC 555 - 549)이 역(易,하역수下易水 근처)으로 옮겼다

 

☞ 『 < 사마천 사기(史記) 卷三十九 진세가(晉世家) >』

(BC 589) 진 경공 11년 진(晉)나라는 이에 극극, 난서, 한궐에게 전차 800승을 주어, 

노나라 위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BC 557년) 진 평공 원년에 제나라를 정벌하여 

제나라 영공(靈公)과 미하(靡下)에서 싸웠다. 제나라의 군대가 패하여 달아났다.

(BC 550년) 진 평공 8년 제나라 장공은 난영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회군하여 

진(晉)나라의 조가(朝歌)를 빼앗고 돌아갔다

 

[원문] 晉景公十一年 晉乃使郤克 欒書 韓厥以兵車八百乘, 與魯衛共伐齊.

           晉平公元年 伐齊, 齊靈公與戰靡下, 齊師敗走.

           晉平公八年 齊莊公聞逞敗, 乃還, 取晉之朝歌去.

 

☞ 『 < 춘추좌전(春秋左傳) >』

 

(魯)襄公 二十一年 叔孫還奔 [ 노 양공 21년(BC 552) 숙손환이 연(燕)나라로 도망갔다 ]
(魯)襄公 二十九年 齊公孫蠆 公孫灶放其大夫高止於北燕
[ 노 양공 29년(BC 544) 제나라 공손채와 공손조가

 대부 고지를 북연(北燕)으로 추방했다 ]
(魯)昭公 三年 「子雅放盧蒲嫳于北燕
[ 노나라 소공 3년(BC 539)  자아가 노포별을 북연(北燕)으로 추방했다 ]
(魯)昭公 三年 「北燕伯款出奔齊」
[ 노나라 소공 3년(BC 539)  북연(北燕)의 군주 관(款)이 제나라로 도망쳤다  ]
(魯)昭公 六年 「齊侯伐北燕
[ 노나라 소공 6년(BC 536) 제나라가 북연(北燕)을 공격했다 ]
(魯)昭公 十二年 「齊高偃帥師納北燕伯于陽」
[ 노나라 소공 12년(BC 530)에 제나라 고언(高偃)이 군대를 거느리고

북연(北燕) 군주(伯)를 양읍에서 마중하였다 ]
(魯)定公 十年 「成何奔[ 노나라 정공 10년(BC 500) 성하는 연(燕)나라로 도망쳤다 ]

 

 

☞ 『 < 한비자(韓非子) 「유도(有度)」 >』 

연나라 소왕(소양왕, BC 312 - 279)이 하수를 경계를 삼아 계薊를 나라로 삼았다
탁(涿)과 방성(方城)을 습격하고, 제(齊)나라를 멸할 정도로 해치고, 중산(中山)을 평정하였다 


[원문] 燕(昭)襄王以河爲境, 以薊爲國, 襲涿, 方城, 殘齊, 平中山.

 

☞ 『 < 염철론(鹽鐵論) 험고(險固) >』 

연(燕)나라는 갈석산에 의해 막히고, 사곡(사하)에 의해 끊겼으며, 요수(遼水)에 의해 둘러싸였다.

 

[원문]  塞碣石, 絶邪谷, 繞援遼.

 

☞ 『 < 사마천 사기(史記) 卷四十三 조세가(趙世家)>』

무령왕 10년(BC314)에 제나라가 연나라를 격파했는데

연나라의 재상 자지(子之)가 군주가 되고 군주가 도리어 신하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령왕 11년(BC 312)에 무령왕이 한나라에서 공자(公子) 직(職)을 불러 연왕(燕王)으로 세우고 악지(樂池)에게 호송케 했다.

 

[원문]  趙 武靈王 十年 齊破燕, 燕相子之為君, 君反為臣.
趙 武靈王 十一年 王召公子職於韓, 立以為燕王, 使樂池送之.  

  

■ 남연국(南燕國)은 고대 사서에 나타나지 않으니 춘추시대 남연국(南燕國)은 존재하지 않았다

1) 연(燕)나라를 북연이라 하고 황제의 후손인 길(姞)씨의 연(燕)나라를 남연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춘추시대 연나라가 북경지역이 아니라, 하남성  연진현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여 주장한 것으로 본다

2) 황제의 후손인 길(姞)씨의 연(燕)나라가 남연(南)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정나라 목공의 모친의 이름이 연길(姞)이니 연()나라의 길(姞)씨로 추정하는 근거없는 주장이다

3) 정 목공의 모친으로 남연의 길씨라고 주장하는 연길(燕姞)의 선조는 백조(伯鯈)
진(晋)의 중이가 적나라에 도망갔을 때 적나라가 구여(咎如)를 토벌하고 두 여자를 얻었는데 

장녀는 중이에게 시집보내어 백조(伯鯈)와 숙유(叔劉)를 낳았고, 어린 여자는 조최에게 시집보내어 조순(趙盾)을 낳았다

중이의 아들 백조(伯鯈)
제후로 봉해진 적이 없기에 남연은 길씨의 남연이 될 수 없다
또한 연나라 이외의 남연이라는 나라는 춘추시대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춘추시대 말에 하남성 황하근처(연현 燕縣)의 연나라가 하북성 남부(역易, 하역수下易水 근처)로 도읍을 옮겼는데

춘추시대 하남성 연나라를 남연(南燕), 춘추시대 말 하북성 남부의 연나라를 북연(北燕)으로  불리웠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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