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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동북공정 결과인 바이두 백과사전을 보면 북한 평양에 안동도호부 표시가 없으니

     북한 평양은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이 아니다

    1) 북한 평양에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다면

       동북공정을 홍보하는 바이두 백과의  669년 당나라 지도에 안동도호부 위치를  북한 평양에 표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두 백과의 669년 당나라 지도에 북한 평양에 안동도호부 표시가 없으니

        AD 668 ~ AD 676까지 고구려 평양성에 설치한 안동도호부 위치는 북한 평양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2) 바이두 백과의 741년 당나라 지도에 하북성 진황도시에 안동도호부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니

          하북성 진황도시가 멸망당시의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이다

 

          (1) 후한서 동이열전에 당 고종의 아들 이현인 장회태자가 고구려 평양성은 동옥저에 있다고 했으니

              동옥저의 위치가 창해군(동예)인 하북성 창주시의 동북쪽으로 하북성 진황도시다

              따라서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의 위치는 하북성 진황도시다

          (2) 714년 ~ 743년 안동도호부는 당나라 평주에 있었으니 741년 안동도호부 위치가 당나라 평주이니

               당나라 평주가 하북성 진황도시였다고 중국이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당서 지리지에 따르면)  당나라 평주에는 노룡현만 있었고

               수나라 평주(북평군)가 노룡현이었는데  노룡현은 한나라 시대의 요서군 비여현이었다

               따라서 한나라 시대에  하북성 진황도시에는 동옥저가 있었기에

               한나라 요서군의 비여현이 하북성 진황도시에 있을 수 없으니 당나라 평주는 하북성 진황도시가 아니다

 

☞ 『 < 구당서(舊唐書) 지리지(地理志) 평주(平州) >』

    당나라 평주는, 수나라에서는 북평군이었다. 당 고조 무덕 7년(624)에 림유현과 무녕현을 없앴다. 노룡현만

    남았는데 노룡현은 후한의 비여현으로 요서군에 속했으며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고치지 아니하였다

    (당나라 고조) 무덕 2년(619년)에 (비여현을) 노룡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문] 平州. 隋為北平郡. 武徳七年, 省 臨渝 撫寧 二縣.

              盧龍, 後漢肥如縣, 屬遼西郡, 至隋不改. 武徳二年, 改為盧龍縣.

 

■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나타난 동천왕의 고구려 평양성 위치 고찰

  1)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천왕 21년(AD 247)에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도읍으로 삼을 수 없으니,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으며 고국원왕 13년(AD343)에 평양동쪽 황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2) 정사 삼국지는 서진의 진수(AD233 ~ 297)가 작성했으니 정사 삼국지에서 고구려 위치를 설명한 내용은

         동천왕이 수도를 옮긴 평양성이다 

    3) 고구려 평양성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당나라 고종(즉천무후)의 아들 이현 장회태자가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 조에 고구려 동쪽 경계선 부근에 개마대산이 있고

         개마대산 동쪽이 동옥저인데 개마대산 동쪽에 고구려 평양성이 있다라고 했다

    4) 예의 임금 남여가 항복해서 한무제가 설치한 창해군이 하북성 창주시이고 창해군의 위치가 동예(예)이다

        동예(예, 창해군)의 북동쪽에 동옥저가 있으니 동옥저의 위치는 하북성 진황도시다

 

     따라서 동옥저에 평양성이 있었다고 장회태자가 주장했으니 하북성 진황도시에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다

      고구려와 동옥저 사이의 개마대산은 하북성 진황도시의 지금의 갈석산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 진황도시의 지금의 갈석산은 갑주를 씌운 말(개마) 모양의 산이니 

               고대 중국인들이 지금의 갈석산을 개마대산으로 불렸다고 본다

 

☞ 『 <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동옥저(東沃沮)」 >』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장회테자가 주석하기를, 그 산(개마대산)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다

     [원문] 沃沮 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章懷注, 其山在今平壤城西       

  

☞ 『 <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동옥저(東沃沮)」 >』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고, 그 산(개마대산)은 평양성 서쪽에 있다

     [원문] 東沃沮 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 其山在今平壤城西.

    

■ 정사 삼국지의 고구려 위치나 지형 내용은

     서진시대(AD 256 ~ 297)의 고구려 수도인 진황도시의 고구려 평양성을 설명한 것이다

   

      ※주) 정사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고구려 마지막 기록은 AD 245년 관구검과 동천왕의 전쟁 기록이고

               진수(AD233 ~ 297)가 서진시대(AD 265∼316)에 작성했으니, 동천왕이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긴

               AD 247년을 지난 AD 256년 이후가 아무리 빨리 잡아도 정사 삼국지가 작성된 년도가 된다

   

      ☞ 『 < 정사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고구려 평양성 위치 및 지형 특성 -> 진황도시 부근 설명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위만)조선인 낙랑군·예맥(동예)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환도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어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산골의 물을 식수로 한다.

          좋은 밭이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주) 중국 삼국시대(AD220 ~ 263)에 고구려 수도는 347년 이전에는 환도성. 347년 이후에는 평양성이었다

              진수가 삼국지를 작성한 서진시대의 고구려 수도는 평양성이었으니 환도가 아니라 평양성으로 고쳐야 한다

 

       1) 고구려(평양성)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형수시 안평현(요동군)에서 동북쪽으로 진황도시(평양성)까지의 거리가 490 km로 대략 천리정도다

        2) 요동군이 형수시 안평현이고 고구려 평양성이 진황도시이기에

             고구려(평양성)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는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고구려 설명 내용과 부합한다

 

 

■ 구당서에 기록된 멸망 직전(AD 600년 경)의 고구려 영토 고찰

 

1) AD 945년에 완성된 구당서의 고구려 영토 내용은 멸망 직전인 AD600년 경의 고구려 영토를 설명한 것이다

고구려 평양성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신라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면 백제에 이른다고 했으니

고구려 위치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가 될 수 없다

 

-. 한반도 북부나 만주에서 동쪽 바다인 동해를 건너면 신라가 일본열도에 있게되고

-. 한반도 북부 남쪽에는 바다가 없으며, 만주 요동에서 바다인 요동만을 건너면 백제가 서해바다가 되니

 

             고구려 영토는 하북성 북부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라

고구려 평양성인 진황도시에 동쪽으로 바다는 요하를 가르키고, 남쪽으로 바다는 형수시의 부양하를 카르킨다

따라서 남북 2천리는 형수시에서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서요하 지류인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까지의 거리가

826 km이니 대략 2천리다

동서 3천 1백리는 만주 요하에서 산서성 대동시 서쪽의 황하까지 거리가 1143 km이니 대략 3천 1백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멸망 직전인 AD 600년 경의 고구려 영토는 하북성 진황도시 평양성을 중심으로

남북으로는 하북성 형수시에서 내몽고 자치주 적봉시까지 이고

동서로는 만주 요하에서 산서성 대동시 서쪽의 황하까지가 고구려 영토로 추정된다

 

※주) 사마천 사기의 해(海, 바다)의 집해(集解)에서 "서광이 말하기를 바다 해(海)자는 한편으로는

하(河, 강)의 의미로 사용한다(司馬遷 史記 : 徐廣曰 海一作河)고 했으니

고대 중국인들은 큰강이나 큰호수를 바다라고 했다

 

☞ 『 <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 >』

고(구)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했다. 동으로 바다를 건너면 신라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면 백제에 이른다.

(고구려 영토 크기는) 동서로는 3천 1백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원문] 高麗 者, 其國都於平壤城. 東渡海至於新羅, 南渡海至于百濟. 東西三千一百里, 南北二千里.

 

2) 삼국사기에서 유리왕 시절 선비가 화친하지 않고 고구려를 자주 노략질하였기에 BC 9년에 부분노의 계책으로

항복을 받아서 선비를 고구려의 속국으로 삼았다

하북성의 고구려(부여) 서쪽에 선비가 있으니 선비는 산서성 대동시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또한 하북성 북경 지역에는 유리왕과 관계된 유리하 유리묘 등의 지명이 남아 있으니

고구려 유리왕 시대의 국내성은 하북성 북경 지역으로 추정된다

 

 

■ 고구려 수도 이동과 수도 위치

     

  1)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수도는 주몽의 졸본성(BC 37), 유리왕의 국내성(AD 3), 산상왕의 환도성(AD 209),

       동천왕의 평양성(AD 247), 고국원왕의 황성(AD 343, 평양동황성=평양 동쪽의 황성),

       장수왕의 평양성(남평양성, AD 427년), 평원왕의 장안성(평양성, AD 586)이다

 

  2) 당태종이 편찬 지시한 북사 고구려열전에는 고구려 3경이 국내성, 평양성(장안성), 한성이라고 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고구려 수도에는 한성이 없고 모두 3글자인데 황성만 2글자다

      황성(黃城)의 의미는 황제의 성이니

      고구려 수도 황성(평양동황성=평양 동쪽 황성)을 당나라 학자가 한성(漢城)으로 바꾸어 기록한 것으로 본다

 

  3) AD 245년(동천왕) 관구검에게 환도성이 초토화 되었고, AD 342년(고국원왕)에는 전연 모용황이 환도성을

      함락하고 환도성을 파괴하였다.

      환도성이 여러번 침략당하고 파괴된 것은 고대 중국 왕조와 가까웠기 때문이기에 평양성인 진황도시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황성(요하 동쪽 요양시 부근)으로 고국천왕이 도읍을 옮겼다고 본다.  

 

  4) 졸본성은 비류수 부근에 있고 관구검과 환도성의 동천왕이 전투한 장소가 비류수이니

      졸본성과 환도성 모두 비류수 부근으로 추정된다
      

      한나라가 조공한 옥갑으로 (졸본)부여왕의 장래를 치렸는데

      옥갑이 출토된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이 졸본성으로 보이니 하북성 보정시 지여게 비류수가 있었다

 

      비류수(沸流水)의 뜻을 풀이하면 (끓을 비 자=용솟음할 불자)에,  (흐를 류)이니
      폭포처럼 흐르는 강이니, 폭하(瀑河, 폭포 폭, 물 하)다
       하북성 보정시 지역의 폭하(瀑河)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비류수(沸流水)다

 

      환(丸)의  상형문자와 비슷한 산이 있는 하북성 보정시 역현 북소촌(北邵村) 지역을

      환도성(안시성)으로 추정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안시성이 고구려 도읍이었다는 내용이 있으니 안시성을 환도성으로 추정한 것이다)

   

  5)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남평양성으로 하북성 형수시 안평현에 있었던 요동성이다

       (신당서에서 요동성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고 쇠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세모창인 신물이 있다고 했으니

       요동성이 장수왕의 평양성인 남평양성으로 추정된다 - 고구려 수도였기에 신물이 있었다)

 

   6) 하북성 북경 지역에는 유리왕과 관계된 유리하 유리묘 등의 지명이 남아 있으니

        고구려 유리왕 시대의 국내성은 하북성 북경 지역으로 추정된다

 

☞ 『 < 북사(北史) 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 >』

    고구려 도읍은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 또 국내성 및 한성이 있는데, 역시 별도의 도읍으로  그 나라에서는 3경이라 부른다.

 
    [원문] 其國, 都平壤城, 亦曰長安城. 其外復有國內城及漢城, 亦別都也, 其國中呼爲三京.

  

  

■ 수서의 살수가 구당서의 압록수로 지금의 하북성 난하((灤河)다

 

     1) 수서 우문술열전의 살수가, 구당서 이적열전의 압록수다

          -.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시 수서 우문술열전에 압록수에서 살수까지 거리가 450리, 살수 동쪽에
              평양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살수에서 평양성의 거리는 200백리로 추정)

          -.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시 구당서 이적열전에 압록수에서 동쪽으로 200리 거리에 평양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나라 시대와 당나라 시대에 평양성은 같은 곳에 있었기에

          수서 우문술열전의 살수가, 구당서 이적열전의 압록수다

  

       ☞ 수서와 북사 『우문술 열전』
            우문술은 9군을 거느리고 압록수에 도착했다 ..., 그리하여 (우문술은) 여러장수들과 (압록)수를 건너
             그(을지문득)을 추격했다. 당시 문덕은 우문술의 군대에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우문술의 군대를 
             무너뜨리려고 싸울 때마다 편하게 북쪽으로 갔다. ...,  (우문술은)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서, 평양성에서
             삼십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하여 군영을 설치했다. ...,  (우문술은) 고구려의 거짓 항복을 핑게로 회군했다.

             우문술의 군대의 절반이 살수를 건너자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의 후미를 공격했다. ..., (우문술은) 1.5일을

             도망쳐서 압록수에 도착했는데 도망친 거리가 450리다. (그리고 압록수를 건너 요동성에 도착했는데,

              요수를 건넌 수나라 군사 3십만 5천명 중에서 살아서 요동성에 도착한 군사는 2천7백명으로 기마병이다)

 

            [원문] 與九軍至鴨綠水,..., 遂與諸將渡水追之. 時文德見述軍中多飢色, 欲疲述衆, 每鬥便北.

                      ...,  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   遂因其詐而還.衆半濟, 賊擊後軍. ...,

                      一日一夜, 還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 구당서 『이적 열전』     

            (이적이)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영토를 점령하며서 압록수에 도착했다. 고구려는 남건을 파병하여

             저항했는데,  이적이 병사를 동원하여 남건군대를 격파하고 2백리를 추격하여 평양성이 도착했다

 

           [원문] 率兵二萬略地至鴨綠水. 賊遣其弟來拒戰, 勣縱兵擊敗之, 追奔二百里, 至於平壤城.

 

     2) 수서의 살수가 구당서의 압록수로 지금의 하북성 난하((灤河)다

         -. 당나라 고종 아들 이현(장회태자)의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 주석에 따르면
            멸망 당시의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은  진황도시에 있었다

         -. 수서와 북사 내호아 열전에

            내호아가 창해(발해만)를 바라보면(가르키며) 패수 입구에 이르렀고,

            패수 입구에서 평양까지 거리가 육십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서 내호아열전에 수나라 시대의 패수는 발해만에 있었고, 패수 육십리 거리에 평양성(장안성)이 있으니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은 만주 요양이 될 수 없고, 북한 평양도 될 수 없다

    

            수나라 시대의 패수는 발해만에 있었고,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이 진황도시에 있었다는 장회태자의

            주석이 수서와 북사의 내호아열전으로 증명되니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이 진황도시 무녕현이고,수나라 시대의 패수는 양하洋河이고,려성이 평양성이다

 

             따라서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인 진황도시에서 서쪽으로 200리 거리에 있는
             지금의 하북성 난하가
 수서 우문술열전의 살수이며, 구당서 이적열전의 압록수다.  

 

             수나라 살수 서쪽(서남쪽) 450리 거리에 수나라 압록수가 있었으니

             하북성 난하 서쪽(서남쪽) 450리 거리에 있는 영정하가 수서 우문술열전의 압록수다

 

            ☞  북사와 수서 『내호아열전』
             내호아가 누선을 이끌고 창해(발해만)을 가르키며(바라보며), 패수를 따라 평양까지 육십리를 갔다.
             중국 고대사서에 발해만을 당나라 시대까지 창해로 기록되어 있음

 

              [원문] 護兒率樓船, 指滄海, 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 고구려 평양성.압록수 지명 이동 고찰

  

    1) 당나라 고종 아들 이현(장회태자)의 주장에 따르면 멸망 당시의 고구려 평양성은  진황도시에 있었다

    2) 삼국사기의 살수 대첩시의 수나라 우문술 군대의 평양성 공격 진로를 보면

        압록수(서쪽) --> 살수 --> 평양성이고 살수에서 압록수까지가 450리로 나온다

        평양성이 하북성 진황도시이기에 압록강과 살수는 하북성의 큰 강으로 보이며

        고대 하북성의 큰강은 북쪽부터 난하, 조백하, 영정하, 대청하, 호타하, 부양하인데

        진황도시에서 가까운 큰강은 난하이기에 난하가 살수로 보이고

        살수에서 450리 ~ 500리 거리에 있는 강은 영정하이기에 영정하를 압록수로 비정한다

    3) 원사지리지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평양성의 이름이 압록수(난하) 동(남)쪽 천여리로 이동되어서

        고려서경의 평양성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서경(평양성)은 고구려 평양성인 진황도시(압록수) 동쪽 천여리 거리에 있는

        만주 요하 동쪽의 요양시 지역에 있던 황성(한성)을 평양성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황도시에서 요양까지 거리는 약 400 km로 1천리정도 된다)

    4) 고구려 압록수는 지명 이동이 3번 있었다고 본다
        을지문덕 장군 시절에 고수전쟁 기록인 북사(北史)에 압록수가 처음 등장하는데..
        고대 중국왕조에서 고구려 평양성으로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하는 큰 강으로 나타난다

        평양성 이름이 진황도시 --> 만주 요양 --> 북한 평양으로 이동됨에 따라

        압록수 명칭도 동쪽으로 이동되었다고 본다
        (1) 고구려 말기의 평양인 장안성(진황도시) 평양 시기에는 영정하가 압록수였고
             
구당서 작성 시기(AD 1000년경)에는 난하가 압록수였다

       (2) 고려초기의 서경인 요동반도(요양시) 평양시기에는 요하가 압록수 였고
        (3) 조선 초 평양인 북한 평양(안승의 금마저金馬渚) 시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이다
             ※주) 고구려 부흥운동을 한 안승의 금마저金馬渚의 저渚는 모래섬이나 삼각주를 의미하는데...
                      대동강과 보통강 사이의 삼각주로 지금의 북한 평양으로 추정된다
 

☞ 『 < 원사(元史) 지리지(地理志) 「고구려(高句麗)」 >』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을 함락시키자 그 나라 (평양)은 동쪽으로 옮겨갔다

     (고구려) 압록수(난하)의 동남쪽 천여리에 (새로운 평양이) 있게 되었으나 옛(고구려) 평양은 아니다

     (고려) 왕건이 평양을 서경으로 불렸다

 

     [원문] 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至王建, 以平壤為西京.

 

■ 수나라 양제 장성 축조

 

☞ 『 < 수서(隋書) 卷二十四   「第十九 식화(食貨)」 >』

   수양제 대업 3년(607) 양제가 (장안)북쪽으로 순시했고, 백성 백만을 동원시켜 (장안) 북쪽에 장성을 쌓았다

   장성은 유림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하에 이르렀는데 천여리다 죽은자가 태반이다

 
   [원문] 明年((大業三年,607), 帝北巡狩. 又興衆百萬, 北築長城, 西距楡林, 東至紫河, 綿亘千餘里, 死者太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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