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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반도사관·식민사관의 출발점은 연나라가 차지한 고조선 서방 2천여리(만번한까지)
수 구 리 2026. 9. 15. 13:59■ 동북공정·반도사관·식민사관의 출발점은 연나라가 차지한 고조선 서방 2천여리(만번한까지)
(1) 동북공정·반도사관·식민사관의 출발점은
『위략』의 고조선의 '서방 2천여 리(약 800km) 상실' 기록을 근거로
연나라 영토를 북경 서쪽인 장가구시(상곡군)부터 요하 동쪽인 심양(요동군)으로 확정하고,
위만조선 왕험성을 대동강 평양으로 설명해 왔다
(2) 그러나 이는
『사기』의 연나라가 동호와 진번조선 침략 기록(각 1천여 리)을
『염철론』벌공편에서 각각 다른 사건의 설명하고 『위략』이 1천여리 두 영토를 합산한 2천여리가 되었다.
(3) 만약에
동호와 진번조선이 같은 고대국가 다른 표현으로
연나라가 1천여 리(약 400 km) 고조선 서방 영토를 차지했다면
위만조선의 왕험성은 하북성 진황도시 부근(약 400km 지점)이어야 한다
(4) 구불구불한 고대 도로는
굴곡률 70%을 적용한 1천여 리(약 400km)는 직선거리 7백여리(약 280km)이기에
북경 서쪽 장가구시(상곡군)에서 280km는 북경과 진황도시 중간의 옥전현(요동군)이니
연나라 영토의 대폭적인 축소는 불가피하다
1) 역사 왜곡 논란의 출발점: ‘고조선 서방 2천여 리 상실’ 기록
중국 동북공정과 한국 주류 사학계에서
고조선과 연나라의 강역 경계를 확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인용하는 문헌은 『삼국지 위략(魏略)』의 기록이다.
"전국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영토 2천여 리를 빼앗고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
기존 학계는 이 '2천여 리'라는 수치를 근거로
연나라의 영토를 북경 서쪽에서 요하 동쪽인 '심양' 일대까지 확정하고
이에 따라 위만조선 왕험성을 대동강 평양으로 설명한 것이다
2) 제1단계 모순: 『사기(史記)』가 보여주는 연나라 영토의 동쪽끝
하지만 이보다 앞서 저술된 최고 권위의 사서 『사기』의 기록들을 상호 비교해 보면 지리적 모순이 드러난다.
(1) 사기 흉노열전:
연나라 진개가 동호를 격파하고 영토를 1천여 리 넓힌 뒤 그 동쪽 끝에 '요동군'을 설치했다.
(2) 사기 조선열전:
연나라가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차지했는데, 그 동쪽끝에 역시 '요동군(요동외요)'이 있었다
.
동호를 밀어내고 확보한 영토의 동쪽 끝과,
진번조선을 침략해 차지한 영토의 동쪽 끝이 모두 '요동군'으로 일치한다
이는 동호와 진번조선이 별개의 영토가 아니라
고조선이라는 하나의 고대 국가가 가진 강역을 사서 내용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것임을 시사한다.
즉, 연나라가 실제로 확보한 영토는 2천여 리가 아니라 1천여 리 내외였음을 알 수 있다.
3) 제2단계 오인의 시작: 『염철론(鹽鐵論)』의 착각
그렇다면 1천여 리라는 수치가 어떻게 2천여 리로 변화했을까?
그 과정은 전한 시대 학자들의 토론 기록인 『염철론(벌공편)』에서 확인된다.
당시대 학자들은 『사기』의 두 기록을 개별적인 연쇄 사건으로 오인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연나라가 동호를 기습하여 영토를 1천리 차지했고, 요동을 통과하여 (진번)조선을 공격했다."
지리를 잘 몰랐던 전한 시대 학자들이
'동호 1천여 리'와 '진번조선 1천여 리'를 각각 별개의 사건이자 독립된 영토로 착각하여,
동호를 치고 나서 요동을 통과하여 진번조선을 별도로 한 번 더 쳤다고 문맥을 연결한 것이다.
4) 제3단계 수치 2천여리 확정(중복 합산 오류)
후대에 『위략』을 쓴 저자는 이 『염철론』의 오인된 인과관계를 그대로 수용했다.
(1) 실제 연나라가 확보한 영토: 1천여 리(동호와 진번조선은 같은 강역의 다른 표현)
(2) 위략의 계산 방식: 동호 영토 1천여 리 + 진번조선 영토 1천여 리 = 고조선 서방 2천여 리
앞선 사서들의 지리적 맥락을 깊이 검토하지 못한 채,
동호와 진번조선을 고조선의 서방 영토로 판단하여
각각의 1천여 리 기록을 중복 합산하면서 '2천여 리 상실'이라는 가상의 수치가 도출된 것이다.
5) 고대 거리의 현대 거리 변환과 지리적 검증
고대의 '리(里)'는 자로 잰 직선거리가 아니라 굴곡이 심한 고대 도로를 걸어간 거리를 의미하기에
진개가 확보한 1천여 리는 굴곡률 약 70% 적용하면, 직선거리는 7백여 리(약 280km)에 해당한다.
(1) 7백여 리 적용시:
요동군의 위치는 북경과 진황도시 중간의 옥전현
연나라의 서쪽인 장가구시(상곡군)에서 7백여 리 거리는 북경과 진황도시 중간의 옥전현(요동군)이 된다
따라서 연나라 영토의 동쪽 끝인 요동군은 진황도시는 고사하고 당산시에도 미치지 못한다
(2) 또한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진나라 북쪽 경계는 만리장성이고, 진나라의 동쪽 경계가 고조선과 맞닿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조선의 위치는 만리장성 남쪽으로, 서쪽으로 진시황의 진나라를 마주보고 있었다
(3) 만약 진황도시 만리장성이 진시황의 만리장성이라면
고조선의 영토는 진황도 남서쪽인 하북성 중부(창주시 일대)에 있어야 한다
이처럼 고조선의 영토가 하북성 창주시 일대까지 내려오게 되면,
고조선 서쪽에 위치했던 연나라의 연5군(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도 하북성 중부 이남으로 함께 내려와야 한다.
연5군(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이 하북성 중부 이남으로 내려오면
연나라 장성인 진시황의 만리장성도 하북성 중부 호타하로 내려와야 한다
(산서성 양천시에서 하북성 형수시 안평현 일대까지가 연5군이 설치된 장소가 된다)
6) 결론: 역사 왜곡 논리의 학술적 붕괴
중국 동북공정과 반도사관, 식민사관은 문헌의 전후 맥락을 살피지 않고
『위략』에 기록된 '2천여 리'라는 숫자를 지표로 삼아,연나라 영토를 부풀리고 고조선의 영토를 축소했다.
그러나
『사기』, 『염철론』, 『위략』으로 이어지는 문헌 전개 과정을 추적해 본 결과,
2천여 리라는 수치는 동일 지역의 두 가지 1천여 리 기록을 후대의 학자들이 착각하여 합산한 결과가 명백하다.
지리적·문헌적 진실에 비추어 볼 때,
연나라의 영토는 요하 동쪽 심양까지가 아니며, 고조선의 실제 위치는 하북성 중동부 창주시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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