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한무제 당대 문헌인 사마천사기 화식열전에
      한(漢)나라가 황하 주변의 크지 않은 나라였다 기록되어 있다

BC 91년 한무제 시대에 편찬된 사마천 사기 화식열전

관중(장안, 서안) 평야가 천리이며 한나라 영토(천하)의 3분의 1(1/3)이라고 되어 있으니

한나라는 섬서성과  하남성을 차지한 지금의 황하 주변 지역의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고 기록한 것이다.

 

☞ 『사마천 사기(史記) 卷百二十九 「화식열전(貨殖列傳)」』
    관중(關中)은 견(汧)과 옹(雍)에서 동쪽으로 황하와 화산(華山)에 이르기까지
 기름진 땅과 비옥한 들판이

    사방 천 리에 펼쳐져 있다. 그리하여 관중의 땅은 천하(한나라)의 3분의 1에 인구는 10분의 3에 지나지 않지만

    그 부유함을 따져보면 10분의 6을 차지하고 있었다.

 
     [원문] 關中自汧, 雍以東至河,,華, 
膏壤沃野千里.

                故關中之地, 於天下三分之一, 而人眾不過什三. 然量其富, 什居其六.

  

■ BC 3세기 말의 한고조 유방 시기에
     호타하 북쪽의 하북성 북부에는 북부여가 있었다

 

1. 사마천 사기 화식열전에는 BC 3세기 말에 연나라 북쪽에
    오환과 (사방 2천리의) 부여(북부여--> 졸본부여)가 나라히 인접해 있다고 했다

 

    산동성 덕주시의 발해군과 태행산맥의 갈석산 사이에 연나라 도성 계가 있다고 있다고 했으니

    연나라 도성 계는 하북성 중부 호타하 남쪽인 석가장시 남쪽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나라가 석가장시 남쪽에 있으니 하북성 중부 호타하 북쪽의 연나라 북쪽인

    하북성 북부는 (북)부여 영토였고, 북부여 서쪽인 산서성 중북부는 오환의 영토였다 

     

☞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발해군(勃海郡)」』
    발해군(勃海郡)은 고제(高帝, 한고조 유방)가 설치했는데,
    사고가 말하기를 발해(勃海)의 물가에 있기에 발해군으로 이름지어진 것이라 했다
.

  
     [원문] 勃海郡 高帝置, 師古曰在勃海之濱 因以為名.

 

☞ 『사마천 사기(史記) 卷百二十九 「화식열전(貨殖列傳)」 』

     연나라는 발해군(발해)과 갈석산 사이에 있는 도회지이다.

      남쪽으로는 제(齊)와 조(趙)에 통하고,
     동북쪽은 호(동부여= 당산 존화시遵化市 지역 )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오환(烏桓)과 부여(夫餘)와 이웃해 있고,
     동쪽으로는 예맥조선, 진번과 교역으로 상업적인 이익을 얻는다. 

  
     [원문] 夫勃碣之閒, 一都會也. 通齊, 趙. 東北邊胡. 鄰烏桓夫餘綰穢貉朝鮮, 真番之利.

   

2. 사마천사기 화식열전을 분석하면

    한고조 유방의 BC 3세기 말에 흉노 묵돌에게 패하여 동호가 오환으로 바뀌었는데 오환으로 기록되어 있고,

    BC 194년 경에 진번은 위만조선에게 복속되었기에 위만조선 시대에는 진번은 존재하지 않는데 진번이 등장한다

  

    따라서 흉노 묵돌이 동호를 격파하고 나서 위만조선이 건국되기 전인

    BC 3세기 말과 2세기 초의 연나라 내용사마천사기 화식열전이 설명한 것이다

 

3. 결론적으로

   한고조 유방의 전한 초(BC 3세기 말 - 2세기 초)에 하북성 북부는 고조선인 북부여 영토였다

 

■ BC 2세기 위만조선 시대(전한시대)에
     하북성 중부 동부지역인 창주시에는 동예(예)가 있었고 ,

     산동성과 강소성에는 삼한(마한, 진한, 변한)이 있었다 

  

1. 위만조선 위치가 나오는 정사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부여, 동예, 진한등의 위치는

    BC 2세기 위만조선 시대(전한 시대)의 고조선 열국 위치를 기록한 것이다

 

    위서동이전 예(동예, 동이족의 예)조에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예의 남쪽인 진한, 예의 북쪽인 고구려 옥저)'에서

     오늘날 조선은 위만조선이니, BC 2세기 위만조선 시대의 고조선 열국 위치를 표현한 것이다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예(濊)」』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으니,

    오늘날 (위만)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원문]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

 

2. 예(동예, 동이족의 예)의 임금 남여가 항복하여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
하니 연나라(북경)와 제나라(산동성 제남시)

    사이가 소란스러워 졌다고 했으니 예(동예, 동이족의 예)의 위치는 하북성 중부 동부지역인 창주시

 

☞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예(濊, 동예東)」

  한무제 원삭 원년(B.C.128)에 예(濊)의 임금(君) 남여(南閭)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구(萬口)를 이끌고,

   요동군에 귀속하였으므로,  한무제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원문] 元朔元年(B.C.128), 武帝年也.
          濊君南閭 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 『 한서(漢書) 卷六 「무제기(武帝紀) 第六」』

원삭元朔 원년(BC 128) 동이(東夷) 예(薉)의 임금(君) 남려(南閭) 등 구(口)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했다.

예(薉)의 주석에서】, 진작이 말하길 예(薉)자는 옛 글자 예(穢)다.

복건이 말하길, 예(薉)는 예맥(穢貊)인데... 진한의 북쪽에 있고, 고구려.옥저의 남쪽에 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다

  

[원문] 元朔元年(B.C.128)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주석: 薉】 晉灼曰 :「薉, 古穢字.」 , 服虔曰 :「穢貊在辰韓之北, 高句麗·沃沮之南, 東窮于大海.」 

  

☞ 『 사마천 사기(史記) 卷三十 「평준서(平準書」 』

팽오가(彭吳) (위만)조선을 멸하고자 하여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제지간(燕齊之間,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쓰러질듯 소란스러웠다.

 

[원문]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閒靡然發動.

 

3. 하북성 중부 동부 지역인 창주시예(동예, 동이족의 예)의 남쪽에 진한이 있다고 했으니

    삼한(진한, 마한, 변한)의 위치는 하북성 창주시 남쪽인 산동성과 강소성이다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예(濊)」』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으니,

    오늘날 (위만)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원문]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원문] 辰韓馬韓之東.

 

  ☞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 

      마한은 서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변진(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다.
 

     [원문] 馬韓在西, 辰韓在東, 弁辰在辰韓之南.

 

■ 사마천사기 조선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에 따르면
    요동군 동쪽에 위만조선이 있었고,
    낙랑군(위만조선) 동쪽에 예(동예, 동이족의 예)가 있었다

1. 사마천사기 조선열전에는 연나라 사람 위만이 요동군 동쪽의 패수를 건너 진고공지 상하장에 위만조선을 세웠다

 

☞ 『사마천 사기(史記) 卷百十五 「조선열전(朝鮮列傳)

     (위만)조선의 왕 위만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위만조선 위치는) 진시황의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진나라 요동외요(요동군이 바깥을 순찰하는 지역)에
 속해 있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그곳(요동외요)가 멀어 지키기가 어려워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정하고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한나라 연왕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의 옷을 입고는
 (요동군) 동쪽으로 달아나 변경을 나와 패수를 건너

      진시황 진(秦)나라 영토였던 옛 비어 있는(진고공지) 상하장에 거주하면서,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을 도읍으로 정했다

  

      [원문]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秦滅燕,屬遼東外徼. 漢興, 為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為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 朝鮮蠻夷及故燕, 齊亡命者王之, 都王險.

 

2.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예(동예, 동이족의 예)의 서쪽에 낙랑군(위만조선)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예()」』 

      예(동예, 동이족의 예)의 서쪽은 낙랑군에 닿았다

 

      [원문] 濊西至樂浪. 

  

■ 사마천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섬서성 북쪽의 오도로스 지역은 흉노영토였다

  

사마천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섬서성 서쪽의 감숙성과 섬서성 북쪽의 내몽고 자치주(오도로스 지역)은 

흉노영토였으나, 유목 민족인 흉노에게는 섬서성 동쪽황하를 건너야하는산서성과 하북성은

약탈하는 지역이지 흉노영토가 아니었다

 

※주)   오도로스 지역의 고조선 호(胡)는 초원사막지대 막조선인 융(戎)으로 임호(林胡)라고 했다 

           흉노(凶奴)는 융노(戎奴)로 융의 노비이니 사막초원지대 막조선의 부족 중에 하나였다

 

1.  흉노열전에 따르면 섬서성 북부지역에 진나라 몽염장군이 장성을 쌓았고, 섬서성 북쪽 황하의 남쪽에 있던

     내몽고 자치주의 (임)호를 황하 밖으로 쫓아냈다.

     진시황본기에는 서북쪽에 있던 흉노를 물리쳐서 쫓아냈다(섬서성 서북쪽이 흉노의 발생지이다).

 

2. 흉노열전에 따르면 진시황이 사망하자 흉노 섬서성 북쪽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서

     섬서성 북쪽의 내몽고 자치주 오도로스 지역의 옛날 임호지역을 차지했다

 

3. 흉노열전에 따르면 내몽고 자치주에서 섬서성 동쪽 황하를 동쪽으로 건너서

     산서성 지역의 동호를 급습하여 동호왕을 죽이고, 백성들과 가축과 재산을 약탈하고는 돌아갔다 

 

결론적으로

섬서성 북쪽의 오도로스 지역은 흉노영토였으나, 여량산맥 동쪽의 산서성, 태행산맥 동쪽의 하북성,

대흥안령 산맥 동쪽 지역은 흉노가 약탈하는 지역이지 흉노영토는 아니었다.

   

 ☞ 『 사마천 사기(史記) 卷百十  「흉노열전(匈奴列傳)」 』

1) 시황제(始皇帝)는 몽염(蒙恬)에게 10만 명의 군사를 주어 
     북쪽의 (임)호를 공격하여 황하 이남의 땅(오도로스 지역)을

     진나라 영토로 만들었다. [진시황본기에는 서북쪽에 있던 흉노를 물리쳐서 쫓아냈다.]

2) (진시황 사후에) 몽염(蒙恬)이 죽자  흉노는 느슨해진 기회를 타 다시 점차 섬서성 북쪽 황하를 건너서

    남쪽(오도로스 지역)으로 내려와  (섬서성 북쪽의) 중원(中原)의 옛 요새(장성)에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3) (흉노)묵돌이 군사를 이끌고 (섬서성 동쪽 황하를 건너서) 동호를 급습하여 
     동호 군사를 대파하고 그 왕을 죽였으며,
 백성들을 사로잡고, 가축과 재산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원문] 1) 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眾北擊胡, 悉收河南地. [西北斥逐匈奴.]

2)  蒙恬死, 於是匈奴得寬, 復稍度河南與中國界於故塞.

3) 及冒頓以兵至擊, 大破滅東胡王, 而虜其民人及畜產.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