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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주(北周, 557년 ~ 581년) 역사서인 주서(周書)에
대방고지의 부여(비류백제) 위구태가 백제 시조로 기록된 이유는?

 
1) 무령왕(재위 501 ~ 523) 부터
    대방고지 부여(비류백제) 위구태와 의려왕(백제 고이왕) 후손으로
    일본열도를 다스리던 좌현왕이자 열도백제왕 사마(무령왕)가
  백제왕이 되었으니
    주서와 북사에 우태(=주몽) 아들 비류의 후손 부여 위구태를 백제 시조로 기록한 것이다

  

2) 북사와 주서의 백제 시조 위구태는
     후한서, 정사 삼국지, 진서의 부여(비류백제) 왕 위구태
     부여 (비류백제) 는 대방고지에 있다가 예=동예로 이동했다

 

※주) 우태(발수에서 잉하여 태어난 별같은 존재로 주몽)의 아들인 비류의 후손이 
             후한서/삼국지/진서 동이열전의 부여 위구태

         ② 백제 고이왕의 성씨가 우씨이고
              백제 고이왕과 진서 동이열전의 부여(비류백제) 의려왕의 사망년도가
              AD 286년으로 동일하기에 백제 고이왕이 부여(비류백제) 의려왕이다

  
3) 부여 의려왕(백제 고이왕) 이후에 백제왕은
      -. 비류왕(재위: 304 ~ 344), 근초고왕으로 이어지는 온조 후손이 백제왕통을 이었고
      -. 개로왕(455〜475), 문주왕, 삼근왕,동성왕(재위 479~501)까지
          온조계열인 모씨가 백제 왕이었다

  

4) 후한서, 정사 삼국지, 진서의 부여(비류백제) 내용

    (비류백제인 부여는 AD 49년을 시작으로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 AD 49년에 부여가 한나라에 공물을 보냈다   
    -. AD 111년에 부여왕이 낙랑군을 공격했다

    -. AD 120년에 부여가 태자 (위)구태를 통해 한나라에 공물을 보냈다
    -. AD 136년에 부여왕(위구태)이 한나라에 와서 조회했다

    -. AD 161년에 부여가 한나라에 공물을 보냈다   
    -. AD 167년에 부여왕 부태가 현도군을 공격했다

    -. AD  174년에 부여가 한나라에 공물을 보냈다

    -. 한나라 말(189 ~ 204)에 공손도가 일족의 딸을 부여왕  (위)구태에게 시집보냈다

    -. AD 240~248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부여왕 위거가 관구검에게 군량을 지원했다

    -. AD 285년 모용외의 공격에 부여가 패하고 의려왕이 자살했고,  왕자들은 동옥저를 피신했다

    -. AD 286년 의라왕이 부여를 재건하여 나라를 회복시켰다

 

☞  "주서(周書) 백제(百濟) 전"
백제는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인 듯 하다
위구태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에 나라를 세우니,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인접하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큰 바다로 경계지어져 있다.

☞   "북사(北史) 백제(百濟) 전"
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에 옛 땅(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는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가 건너 왔다(濟, 건널 제)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불렀다.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
[공손]도는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동맹을 맺으려고] 일족의 딸을 [부여 왕에게] 시집보내었다.

 

5) 주서/북사에서 백제시조가 위구태이니
후한서/삼국지/진서의 위구태 부여가 비류백제다

 

(1) 중국 고대사서인 후한서/삼국지/진서 동이열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일본서기를 교차검증하면

-. 동이열전의 (위)구태의 부여가 비류백제이고
-. 동이열전 (위)구태의 부여(비류백제) 의려왕이 삼국사기 백제 고이왕으로
-. 일본서기와 백제본기, 동이열전의 교차검증하면
   
일본서기 신공황후 47년(AD 247년)에  (위)구태의 부여(비류백제)가 왜의 실권을 장악했고

   일본서기 웅신천왕 16년( 285년) 8월에
   120현의 부여(비류백제)사람들이 열본열도로 건너가서 왜를 부흥시켰다

 

(2) 대륙에 있었던 비류백제(대방고지 부여)가
     한반도 서남부 영산강 지역으로 이동한 후에,

    일본열도로 진출한 내용은 고고학으로도 증명된다
 
   4세기 초.중반부터 영산강 유역에
   -. 분구묘의 대형화 (분구묘는 일본 전방 후원분의 원형이고 기원임),
   -. 대형 옹관 등장,
   -. 백제와 다른 금동관과 금동신발 출토등
 
   비류백제 이동과 영산강 지역 정착을 추론할 수 있는
  고고학적 물질문화 변화가 영산강 지역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 "북사(北史) 백제(百濟) 전"
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에 옛 땅(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다. 내용에서

동명은
(1)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이 아니라(삼국사기에 주몽을 동명성왕으로 기록),
(2) 중국 고대사서인 논형論衡, 후한서, 삼국지에 기록된 졸본부여를 세운 동명왕으로
주몽의 아들 비류는 졸본부여왕의 외손으로 장자이기에
비류의 후손인 위구태를 졸본부여 건국자인 동명의 후손으로 표현되어 있다

(위서 고구려전에 고구려 건국자는 주몽으로 기록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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