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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濊와 동예東濊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이비 역사

  
1)동예 위치를 북한 강원도 동부 지역
2) 예의 위치를 남한 강원도 동부 지역(강릉 지역)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동예東濊와 예濊가 다르다고 학교에서 배웠고 알고 있는 내용은
근거없는 사이비 역사의 결과일 뿐이다

   

  

■ 예濊와 동예東濊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이비 역사인 근거

 
1) (근거 1) 한백겸이 동국지리지에서 예濊를 동예東濊라고 했다

  
후한서 예전(後漢書 濊傳)을 설명하면서
예濊를 동예東濊라고 최초로 표현했다(춘천의 동쪽에 있으니 동예東濊)
 
"濊與貊 雖通稱濊 而其實爲二種 春川以北 通海西 關西 山郡之地爲貊 以東爲濊 故或謂之東濊"
 
맥貊을 춘천으로 본 춘천 동쪽의 동예東濊라는 한백겸의 주장은
중국 고대 역사서를 제대로 고찰하지 않은 한백겸 본인의 주장일 뿐이다

  

2) (근거 2) 한치훈이 해동역사에서 단단대령 동쪽의 예濊를
     지금의(조선의) 대관령 동쪽의 동예東濊라고 했다

 
삼국지 예전(三國志 濊傳)을 설명하면서
"단단대령 동쪽을 (낙랑군 동부) 도위가 주관하게 하면서 모두 예濊로써 백성을 삼았다.
단단대령은 지금의(조선의) 대관령으로,
고개의 동쪽이 모두 바로 예 의 땅이므로 동예東濊라고 칭하는 것이다. "

 

地理考.三國志 濊傳云
"漢時單單大山領以東.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單單大領. 今之大關嶺. 嶺以東卽濊地故. 稱東濊也."
 
그런데 [삼국지 위서동이전]
동옥저에 옥저를 처음에는 현도군으로 삼았는데, 고구려현 서북쪽으로 현도군 치소를 옮겼고,
옥저의 단단대령 동쪽의 영동7현을 낙랑군 동부 도위가 다스렸다고 했다
 
따라서
1) 동부도위가 다스린 영동 7현은 예濊가 아니라 동옥저東沃沮니
2) 단단대령은 지금의(조선의) 대관령이 될 수 없다

 

 

■ 동예 (東濊) 위치는 강원도 강릉 지역이 아니라 연제지간(燕齊之間)이다

  
예濊를 우리는 동예東濊로 알고 있지만,
한무제에게 예 의 임금 남여가 항복해서 창해군이 설치되었는데,
 
사마천사기 평준서와 한서 식화지에
연제지간(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창해군을 설치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예濊=동예東濊 위치는 창해군이 설치된 하북성 창주시다

 

1) 예의 임금 남여가 항복하여 예濊에 창해군을 설치했지만, 수년후에 폐지 했다고
    후한서 동이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원문] 元朔元年(B.C.128), 武帝年也.

濊君南閭 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2) 원삭元朔 원년(BC 128)

    동이(東夷) 예(薉)의 임금(君) 남려등 구(口)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을 설치했다 고
    한서 무제기에 기록되어 있다

[원문] 元朔元年(B.C.128)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3) 팽오가(彭吳賈) (위만)조선을 멸하고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제지간(燕齊之間,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쓰러질듯 소란스러웠다 고
    사마천사기 평준서에 기록되어 있다
 
[원문]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閒靡然發動.

4) 팽오가(彭吳賈) 예맥(=예=동예)과 (위만)조선 간 (도로를) 뚧으려고,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제지간(燕齊之間,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쓰러질듯 소란스러웠다 고
   (한무제 시절에 조선은 위만조선만 있었기에 예맥과 조선으로 해석해야 한다)
    한서 식화지에 기록되어 있다
 
[원문] 彭吳穿 穢貊·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 주서, 북사의 백제시조 구태가
후한서, 삼국지, 진서의 부여/ (위)구태니, 부여는 비류백제다

 
삼국지와 후한서 진서의 부여는 비류백제로 예(濊) 땅인 하북성 창주시에 있었고,
연나라 장성(현도) 북쪽의 사방 2천리 부여는 북부여로 졸본부여, 고구려가 계승했다

1) 삼국지 위서동이전(AD 280년경 편찬)에 없는 " 本濊地也.(부여의 위치는 본래 예濊 땅이다)"

    내용이 후한서 동이열전(AD 450년 경 편찬)에 추가되었으니
    후한시대의 부여 위치는 비류백제 위치로 봐야 한다.

2) 예濊를 우리는 동예東濊로 알고 있지만,
    (1) 한무제에게 예의 임금 남여가 항복했거 창해군이; 설치되었고,
    (
2) 사마천사기 평준서와 한서 식화지에 연제지간(연나라와 제나라 사이)라는 기록이 있으니
     예濊 위치는 하북성 창주시다 

   

3)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夫餘國 한자 원문
    夫餘國, 在玄菟北千里. 南與高句驪,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여기까지가 북부여 위치임)
    本濊地也.
    (후한서에 추가된 내용으로 후한시대 부여-비류백제 위치임)

 

※주) 한문 해석 및 이해(후한서 동이열전 부여夫餘國 위치)

후한서 부여의 위치 문장은 2개로 구분해서 이해할 수 있다
(1) 첫번째 문장은)
" 부여는 현도의 북쪽 천리 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방 2천리다"로 북부여의 위치를 나타낸다
(" 부여는 장성 북쪽, 현도에서 북쪽으로 천리 거리에 있다는 삼국지 위서 내용을 인용했다)
(2) 두번째 문장은)
"(부여 영토는) 원래 예=동예=예맥의 땅이다" 로,  후한서에 추가된 후한시대 부여 위치로
후한시대 부여는 (위)구태의 부여로 비류백제를 나타낸다
 
※주) 무령왕 이후 우優씨인 비류계가 백제왕이 되었으니
주서와 북사에 우태의 후손 (위) 구태를 백제 시조로 기록한 것이다

 

 

■ 예濊=맥貊=동예東濊(동이 예) = 예맥貊:貉= 예맥조선은
    시대에 따라, 중국 사서에 따라 다른 표현일 뿐이다

  

1) 사마천사기에는
    -. 춘추시대에 호맥이 나오고
    -. 전국시대에 문장에 따라 동호나 중산으로 표현되었고
    -. 진한 교체기에 예맥조선이 나오고
    -. 위만조선 시기에 예맥이 되었다가
    -. 그 이후에는 예나 맥으로 이름이 바뀌어 기록되어 있다

 

 2) 예가 예맥인 내용은
     「한서」권6 무제기 창해군 설치 주석에서도 확인된다

秋, 匈奴入遼西, 殺太守;入漁陽、雁門, 敗都尉, 殺略三千餘人.

遣將軍衛靑出雁門, 將軍李息出代, 獲首虜數千級.

東夷薉君南閭等[一]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1) 服虔曰:[一] 「穢貊在辰韓之北, 高句麗沃沮之南, 東窮于大海.」
(2) 晉灼曰:「薉, 古穢字.」
(3) 師古曰:「南閭者, 薉君之名.」

(1) 복건 왈 : (예薉 즉) 예맥(穢貊)은 진한(辰韓)의 북쪽,

      고구려, 옥저의 남쪽에 있었고 동쪽으로 대해로 막혀있었다.
(2) 진작 왈, 예薉는 옛날의 예穢 자다.
(3) 안사고 왈, 남려(南閭)는 예(薉) 의 임금(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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