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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인용하면 무조건 식민사관? 따져보니 사실이다

 

많은 오류와 윤색, 과장이 있는

    일본서기를 기준으로  삼국사기를 해석하거나

    일본서기로 우리고대사를 채우는 것학문적 주장이 될 수 없다

 
(1) 년도가 120년 틀리고(이주갑 인상),
(2) 백제왕명도 틀리는 등( (초고왕, 귀수왕-> 근초고왕, 근구수왕)
 
많은 오류와 윤색, 과장이 있는 일본서기

우리고대사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은 대하 역사소설은 될 수 있어도, 역사적 사실은 될 수 없다

따라서
1) 삼국사기 기준으로 일본서기 내용이 교차검정되면 우리고대사로 이용가능하다
2) 삼국사기와 교차검정되지 않으면
    일본서기 기사는 일본 열도에서 발생한 사건이고
    일본서기 나라 이름은 일본열도에 있었던 나라로 봐야한다
3) 교차 검증되지 않는

    일본서기의 신라,고구려, 백제는 일본열도에 있는 신라, 고구려, 백제 분국
    일본서기의 임나는 일본열도의 가야 분국들로 보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으로 보인다

 

■ BC 33년 : 일본서기 숭신 65년의 임나는 대마도

  

일본서기 숭신 65년에

축자국(후쿠오카 축자시)에서 바다를 2번 건너서(2천리) 임나가 있고,

임나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기 때문 임나 동북지역에서 계림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주) 고대인들은 바다를 한번 건널 때마다 1천리로 셈했다(후한서와 삼국지 왜열전 내용)

 

1) 후쿠오카 축자시( 筑紫市)에서

    (1) 바다를 1번 건너면 1천리 거리의 이키섬(壹岐島),

    (2) 바다를 2번 건너면 2천리 거리의 쓰시마(대마도, 對馬島)

 

2) 대마도 하도(下島)의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고

    대마도 하도(下島) 동북 지역에서 대마도 상도(島)로 갈 수 있다

    

따라서

후쿠오카 축자시(축자국)에서 바다를 2번 건너면 2천리 거리에 쓰시마(대마도)가 있고

대마도 하도(임나)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하도 동북지역에서  상도(계림)으로 갈 수 있다

 

☞ 일본서기 : (숭신 65년) B.C.33년 7월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 리 거리에 있다

     임나의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기 때문에, 계림의 서남에 있다(임나의 동북쪽에 계림)

     [원문] 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 在鷄林之西南.
 

■ AD200년 : 일본서기 신공황후 즉위 전의 신라는 이키섬(壱岐島, 일기도)

 
일본서기 신공 즉위 전(AD 200) 신라 정벌에서
1) 후쿠오카 시카노섬(志賀島)의 서북쪽에 신라가 있다고 했고,
2) 신공황후 배를 따라온 파도가 멀리 (신라) 나라 안에까지 미쳤다고 했으니
    대부분 평야지대로 가장 높은 산이 해발 160m이기에 

    해일에 의해 섬 대부분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섬은  이키섬(壱岐島)섬으로 신라

3) 신공황후에게 신라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키섬(壱岐島)섬의 신공황후 군대를 보고 고구려/백제도 항복했으니

    고구려/백제도 이키섬(壱岐島)섬에 있었다

    신공황후가 AD 200년 정벌한 삼한(신라,고구려,백제)는 이키섬(壱岐島)섬이다
 
☞ 신공황후 즉위 전(AD 200)
    기록의 바닷사람 명초(名草)를 보내어 (서해로 나가서 나라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였다. 

    며칠 뒤에 돌아와서 “서북쪽에 산이 있는데 구름이 띠처럼 두르고 있었습니다.

    무릇 나라가 있는 듯합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순풍이 불어 범선이 파도를 타니 노를 젓는 수고로움 없이도 곧 (신공황후가) 신라에 이르렀다
    그때 배를 따라온 파도가 멀리 (신라) 나라 안에까지 미쳤다

    이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왕은 신라가 도적(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를 엿보게 하였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영외로 나와서 머리를 조아렸는데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이다

    -. '기록의 바닷사람 명초' : 筑前國 糟屋郡 志珂(현재 시카노섬志賀島)에 있던 해인 집단의 일원

    -. '배를 따라온 파도' : 해일의 발생

    [원문] 使吾瓮海人烏摩呂, 出於西海, 令察有國耶. 還曰, 國不見也. 又遣磯鹿海人名草而令視.

          數日還之曰, 西北有山. 帶雲橫絚. 蓋有國乎.

          冬十月己亥朔辛丑, 從和珥津發之. 時飛廉起風, 陽侯擧浪, 海中大魚, 悉浮扶船.

          則大風順吹, 帆舶隨波. 不勞櫨楫, 便到新羅. 時隨船潮浪, 遠逮國中.

          高麗·百濟二國王, 聞新羅收圖籍, 降於日本國, 密令伺其軍勢. 

          則知不可勝, 自來于營外, 叩頭而款. 是所謂之三韓也.

  

■ AD 249년 : 일본서기 신공49년의  7국은 기비 (吉備)지역(오카야마시岡山市)

    ※주) 7국 :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1) 7국 임나 7국으로 주장하는 것은 

                 임나를 한반도 경남으로 지정하기 위한 목적의 논리적 비약으로 궤변이다

            (2) 신공 49년인 AD249년을 근초고왕시기의 AD369년이라는 주장은 

                  일본서기 백제왕 년도를 맟추기 위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궤변이다
 

1)  삼국지 "왜열전"과 "일본서기"를 교차검증하면

     신공49년(AD249년)은 일여-신공황후 3년이다(비미호-신공황후가 아니다)

    (1) 삼국지 "왜열전"에 정시(正始) 8년(AD 247년)에 왜의 여왕 비미호(신공황후)가 사망했고,

          비미호 종실의 여자인 일여(壹與)가 왜의 여왕이 되었다
    (2) 일여-신공황후 즉위년도는 신공47년(AD247년)이다

 

삼국지 "왜열전"

    정시(正始) 8년(AD247)에

    왜의 여왕 비미호(卑彌呼)는 구노국(狗奴國)의 남왕(男王)인 비미궁호(卑彌弓呼)와 본래부터 불화하여

    비미호(卑彌呼)가 마침내 죽자, 다시 비미호 종실의 여자(宗女)인 일여(壹與)를 [왕으로] 세웠다

   [원문] 正始八年, 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卑彌呼以死, 復立卑彌呼宗女壹與.
 
2) 일본서기 일여-신공황후 50년(AD250)에

    큐슈지역(바다 서쪽)을 백제에게 모두 주었다고 했으니 일여-신공황후는 오사카 지역에 있었다

   

☞ 일본서기 신공 50년(AD 250년,오사카 지역의 일여-신공황후 4년)
   이에 황태후는기쁘게 맞이하며 구저(백제인)에게 “바다 서쪽(큐슈)에 여러 한(韓)을 

   이미 너희 나라(백제)에게 주었다. 지금은 무슨 일로 빈번히 또 오느냐?”라고 물었다. 

   [원문] 於是, 皇太后歡之問久氐曰, 海西諸韓, 旣賜汝國, 今何事以頻復來也.

 
3) 일여-신공황후가 오사카 지역에 있었기에

    신공 49년(AD 249년)에 반란을 일으킨 7국은 오카야마시의 기비(吉備)지역에 있었다고 봐야한다

     ※주) 7국 :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 일본서기 신공 49년(AD 249년,오사카 지역의 일여-신공황후 3년 )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해서 깨트리자 7국이 자동적으로 평정되었다
     ※주) 7국 :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원문] 擊新羅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 七國.

 

■ AD 283년 : 일본서기 응신 14년의  가라(임나가라)는 대마도, 신라/삼한은 이키섬(일기도)

  
1) AD 2~3세기 호남(비류백제)에서 일본열도(구주) 건너가는 항해로
    남해안 --> 거제도 --> 대마도(쓰시마) --> 일기도(이키섬) --> 쿠슈(구주)의 후쿠오카(복강시)
 
2) AD 283년 궁월군이 백제에서 일본열도(후쿠오카)로 가려고 했는데
     이키섬(일기도)의 신라가 방해하여, 대마도(쓰시마)의 가라(임나가라)에 머물고 있었다
 
☞ 일본서기 응신 14년(AD 283년)
    이 해에 궁월군(弓月君)이 백제에서 와서 

   “신은 저희 나라의 인부(人夫)120현(縣)을 이끌고 귀화하고자 하였으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加羅國)에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원문] 是歲, 弓月君自百濟來歸. 因以奏之曰, 臣領己國之人夫百廿縣而歸化. 

              然因新羅人之拒, 皆留加羅國

 

3) 일본서기 신공 52년(AD252)에

    "백제가 구저를 통해 칠지도를 보냄" 내용은

    "칠지도 명문"에 "태O 4년(泰O 4年)" 이니 태시( 泰始) 4년(AD268)으로 보인다

     ※주) 백제 고이왕(부여인 비류백제 의려왕)의 태자(의라)가

             동생(응신천황)이 일본열도 큐슈를 차지한 기념으로 칠지도를 제작해서 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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