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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에서
-. (연진)장성 북쪽의 사방 2천리 부여는
북부여--> 졸본부여--> 고구려로 바뀌었고
(요동 동쪽 천리에 있다는 고구려는 AD 247년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의 위치다)
-. 위구태 부여(비류백제)의 위치는
낙랑군 동쪽의 예맥(濊貊=동예=예=창해군)의 영토에 있었다
1)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에
사방 2천리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부여는 현도군에서 1천리 거리에 있다
(삼국지 오서 손권전에 요동군 북쪽 2백리에 현도군이 있다 吳書曰: 玄菟郡 在遼東 北, 相去二百里.)
사마천사기 화식열전과 한서 지리지 연지(燕地)에
연나라 북쪽에 부여와 오환이 있다고 했다
---> 따라서
전국시대 말과 진시황의 진나라/한고조 유방의 한나라 시대의 부여는 북부여--> 졸본부여로
전한 말(BC 59 또는 BC 37)에 졸본부여를 고구려가 계승했다
2)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의 위구태 부여는
"부여의 인장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예성(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래 예맥(濊貊=동예=예=창해군)의 영토였다"
[원문] 其印文言 「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위구태 부여가 연나라 북쪽의 부여이고, 사방 2천리 고구려 서쪽에 있었다면
진서에서 모용황에게 패한 부여 의라가 (동)옥저로 피난할 수 없을 것이다
고구려 동쪽에 (동)옥저가 있으니 고구려 서쪽의 부여 의라가 (동)옥저로 피난하려면
사방 2천리 고구려를 횡단해서 (동)옥저로 가야 하기에 불가능한 주장이 된다
--> 따라서
위구태 부여가 (동)옥저 남쪽의 예맥(濊貊=동예=예=창해군)의 영토에 있었기에
요동 모용황이 공격시 위구태 부여의 의라가 쉽게 (동)옥저로 피신 가능했다
■ 후한서, 삼국지, 진서의 부여가 비류백제이고,
주서, 북사의 백제시조 구태가 부여의 (위)구태다
1) "삼국사기 백제본기" 이설인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 우태를 주몽의 다른 이름인 아명으로 본다
주몽은 우발수(優渤水)에서 잉태하여 태어난 별같은 존재(우태優台)로, (동)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니
우태의 설명과 주몽의 설명이 같기(비슷하기) 때문에 우태가 곧 주몽이다
2) 주서와 북사의 백제 시조 구태가 후한서와 삼국지 부여의 (위)구태다
따라서 후한서와 삼국지 부여가 비류백제다
(1) 삼국지의 부여 에서
(위)구태가 동명의 후손으로(위략에 동명이 부여를 건국했다고 기록),
부여가 고구려와 선비 사이에 있어서, 공손도가 (부여의) 종녀(종실의 딸)을 처로 삼았다고 했고
[원문]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2) 북사의 백제에서
동명의 후손인 구태가 대방의 옛땅에 나라를 세웠고, 공손도가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다고 했으니
[원문]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始立國于帶方故地. 漢 遼東太守 公孫度以女妻之.
부여의 (위)구태와 백제의 구태는 동일인이니 부여가 곧 비류백제다
※주) 비류백제인 부여 내용은 AD 49년을 시작으로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 AD 49년에 부여가 한나라에 공물을 보냈다 -. AD 111년에 부여왕이 낙랑군을 공격했다
-. AD 120년에 부여가 태자 (위)구태를 통해 한나라에 공물을 보냈다
-. AD 136년에 부여왕(위구태)이 한나라에 와서 조회했다
-. AD 161년에 부여가 한나라에 공물을 보냈다 -. AD 167년에 부여왕 부태가 현도군을 공격했다
-. AD 174년에 부여가 한나라에 공물을 보냈다
-. 한나라 말(189 ~ 204)에 공손도가 일족의 딸을 부여왕 (위)구태에게 시집보냈다
-. AD 240~248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부여왕 위거가 관구검에게 군량을 지원했다
-. AD 285년 모용외의 공격에 부여가 패하고 의려왕이 자살했고, 왕자들은 동옥저를 피신했다
-. AD 286년 의라왕이 부여를 재건하여 나라를 회복시켰다
3) 후한서와 진서 동이열전에서 부여인 비류백제 나라 가운데에 옛 예성이 있는데 예맥의 성이라 했으니
비류백제의 위치는 하북성 창주시다
※주) 후한서 동이열전에서
예(동예=예맥)의 임금(예군, 濊君) 남여가 항복하여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했다고 했는데
『사마천사기 평준서』에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제지간(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소란해 졌다고 했으니
연제지간에 창해군을 설치한 것이니,
예=동예=예맥의 위치는 하북성 중동부인 지금의 창주시 지역이다
4) 진서의 의려왕은 우優씨고 백제 고이왕도 우優씨로 같고, 사망년도가 AD AD 286년으로 같기에
진서의 부여 의려왕이 백제 고이왕이다
5) 진서의 의려왕 아들인 의라 태자는
일본서기 응신천왕 14년(283년)과 응신천왕 16년(285년)에 등장하는 궁월군(弓月君)으로 보인다
(1) 한반도 영산강 지역에서 부여(비류백제) 120현을 백성을 데리고 일본열도로 건너가기 위해
의라 태자가 부여본토(하북성 창주시)을 떠난 시기가 AD283에서 AD 285년이다
(2) 전연의 모용외가 AD285년에 부여 본토(하북성 창주시)를 공격해서 멸망시키자
왕자들이 동옥저 지역인 하북성 진황도시로 피신했다(창주시의 예에서 진황도시 동옥저로 피신)
(3) AD 286년 의라 태자가 일본열도에서 급히 귀국해서 서진의 도움으로 부여(비류백제)를 재건하고
나머지 백성들을 데리고, 부여본토(하북성 창주시)를 떠나 한반도 영산강 지역으로 떠났다
(AD 286년 의라가 부여를 재건했지만, 이후 중국 사서에 의라의 기록이 없고
의라신사등 일본열도에 의라의 흔적이 남아 있다)
(4) AD 286년 의려왕(백제 고이왕)이 영산강 지역에서 사망하자
의라 태자가 배류백제(부여)의 의라왕이 되었다
☞ 일본서기
1) 응신천왕 14년(283년) : 궁월군(弓月君)이 백제(영산강 지역)에서 와서
“신은 저희 나라의 인부(人夫)120현(縣)을 이끌고 귀화하고자 하였으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加羅國)에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2) 응신천왕 16년(285년) : 궁월군(弓月君) 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일본열도로)돌아왔다.
■ 비류백제의 이동(하북성 창주시 → 영산강 지역 → 일본열도)
1) 진서 동이열전 의려왕 기록을 마지막으로 비류백제인 부여가 중국 정사에서 사라진다
-. 비류백제인 부여가 멸망했다는 내용은 삼국사기나 중국 정사에 나오지 않는다
-. 의라가 죽었다는 내용도 없고 일본에는 의라를 기리는 의라신사가 있다
(286년 의라가 부여 즉 비류백제를 하북성 창주시에 재건했지만 나머지 백성들을 데리고,
하북성 창주시에서 서해를 건너 살기 좋은 전라도 나주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일본열도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2) 비류백제의 고고학적 물질문화
AD 285년에 전연 모용외의 공격에 나라의 기반이 무너지자
의라왕이 나라 전체를 하북성 창주시에서 영산강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4세기 초.중반부터 영산강 유역에 분구묘의 대형화, 대형 옹관 등장, 백제와 다른 금동관과 금동신발 출토등
비류백제 이동과 정착을 추론할 수 있는 고고학적 물질문화 변화가 영산강 지역에 나타난다
3) 무령왕 시대인 AD 501년에
비류백제 우태의 우씨인 달솔 우영(優永)이 뜬금없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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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종합하고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 내용을 연결해서 정리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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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로왕은 부여의 여씨(황룡이 등장하고 개로왕이 등극했으니 개로왕도 모씨)
2) 문주왕과 동성왕은 모용의 모씨(삼근왕도 모씨로 추정)
3) 무령왕 이후부터는 부여인 비류백제 우태의 우씨로 추정
--> 따라서
부여인 비류백제의 후손인 성왕이 백제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서부터는 백제 시조가 우태로 등장하니, 무령왕 부터 북주시대에도 비류백제의 우씨가 백제왕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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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정리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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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285년 전연의 모용의 공격으로 나라의 기반이 송두리채 무너지자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재건한 하북성 창주시의 부여(비류백제) 의라 태자가
나머지 백성들을 데리고 영산강 유역으로 이동했고, 일본열도까지 진출하게 된다
1)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사망하자
2) 개로왕을 보좌하던 모용씨의 문주가 백제왕이 되었는데..
3) 모용씨의 동성왕을 암살하고 일본열도를 다스리던 우태의 우씨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등극하여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비류백제의 후손인 우태의 우씨가 백제를 다스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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