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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평양성인 장안성 위치 고찰

 

당고종의 아들 장회태자가 고구려 멸망당시 고구려 평양성은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의 동옥저에 있다고 했고,

수서 내호아열전에 평양성인 장안성이 발해만(창해)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동옥저의 위치는 발해만의 진황도시/호로도시 지역이고, 동옥저 서부지역에 고구려 평양성인 장안성이 있었으니

고구려 동쪽의 개마대산은 지금의 갈석산이고, 고구려 평양성인 장안성은 하북성 진황도시에 있었습니다

 

1)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고종의 아들 장회태자가 평양성인 장안성이 동옥저에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주)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둘째 아들인 장회태자(AD 654 ~ 684 )는

         고구려 멸망(AD 668년) 당시의 인물로 고구려 평양성인 장안성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
[원문] 「東沃沮在高句驪 蓋馬大山之東, 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卽王險城也.」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의 이름이고,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개마대산)은 지금(당나라 고종 시대)의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은 즉 왕험성이다

 

2) 『삼국지 위서동이전 동옥저』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고,

   큰 바닷가에 붙어 있는데 그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서 천리쯤 된다고 했으니

   ①한반도 동해안인 북한 함흥시/신포시 지역이거나,② 발해만인 진황도시/호로도시 지역일 수 밖에 없습니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

[원문] 東沃沮在高句麗 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 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3) 당 태종 시기인 AD 636년에 편찬된 수서 내호아 열전

내호아가 누선을 이끌고 창해를 바라보며, 패수를 따라 평양까지 육십리 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내호아가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한반도 동해안을 올 필요가 없고,

중국 고대사서에 창해는 발해만이기에 평양성인 장안성은 발해만에 있었습니다

 

☞  북사와 수서 『내호아열전』

[원문] 護兒率樓船, 指滄海, 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내호아가 누선을 이끌고 창해(발해만)을 가르키며(바라보며), 패수를 따라 평양까지 육십리를 갔다.
중국 고대사서에 발해만을 당나라 시대까지 창해로 기록되어 있음.

 

4) 『후한서 동이열전 예』에  

동예=예=예맥의 위치가 하북성 중동부 창주시라는 내용으로

진황도시/호로도시 지역에 동옥저가 있었다는 내용이 증명됩니다 
(동예=예=예맥 의 북서쪽에는 고구려, 북동쪽에는 동옥저가 있었습니다)

 

후한서의 『동이열전 예』 : 예의 임금 남여가 한무제에게 항복해서 창해군을 설치했는데,

『사기 평준서 한서 식화지』에 창해군의 위치는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라 기록되어 있으니

하북성 중동부인 창주시입니다

 

☞ 『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예(濊, 동예東濊)」 』

  한무제 원삭 원년(B.C.128)에 예(濊)의 임금(君) 남여(南閭)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구(萬口)를 이끌고,

   요동군에 귀속하였으므로,  한무제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원문] 元朔元年(B.C.128), 武帝年也. 濊君南閭 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 『 한서(漢書) 卷六 「무제기(武帝紀) 第六」 』

원삭元朔 원년(BC 128) 동이(東夷) 예(薉)의 임금(君) 남려(南閭) 등 구(口)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했다. 

  

[원문] 元朔元年(B.C.128)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 『 사마천 사기(史記) 卷三十 「평준서(平準書) 」 』

팽오가(彭吳) (위만)조선을 멸하고자 하여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제지간(燕齊之間,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쓰러질듯 소란스러웠다.

 

[원문]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閒靡然發動.

 

☞ 『 한서(漢書) 卷二十四下 「식화지( 食貨志 ) 」 』

팽오가(彭吳賈) 예맥(=예=동예)과 (위만)조선 간 (도로를) 둛으려고,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제지간(燕齊之間,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쓰러질듯 소란스러웠다.
(한무제 시절에 조선은 위만조선만 있었기에 예맥과 조선으로 해석해야 한다)

 

 [원문] 彭吳穿 穢貊·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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