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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의 한나라 제후국인 연나라 사람 위만 이 전국시대 연나라 요동군 상하장 (요동외요, 진고공지, 상하장)에 세운
위만 조선은 영토는 1백리 정도였고 조선이라는 명칭을 도용한 짝퉁 고조선이다
■ 위만조선은 짝퉁 고조선이다
유방의 한나라 제후국인 연나라 사람 위만이
전국시대 연나라 요동군 상하장(진고공지, 요동외요)에 세운 위만조선이기에 짝퉁 고조선이다
※주) 전국시대 연나라 요동군 = 진시황의 진나라 요동군 + 요동외요(요동군이 바깥을 순찰하는 지역)
= 한나라 요동군 + 진고공지 상하장(위만조선)
☞ [출처] 115-1/2[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5.朝鮮列傳(조선열전)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筑鄣塞.
秦滅燕,屬遼東外徼. 漢興, 為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為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 朝鮮蠻夷及故燕, 齊亡命者王之, 都王險.
(위만)조선의 왕 위만은 옛 연(燕) 나라 사람이다.
당초 전국시대 연나라의 전성기 때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고 변방에 성루를 쌓았다.
(위만조선 위치는) 진시황의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진나라 요동외요(요동군이 바깥을 순찰하는 지역)에 속해 있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그곳(요동외요)가 멀어 지키기가 어려워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정하고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한나라 연왕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의 옷을 입고는
동쪽으로 달아나 변경을 나와 패수를 건너
진시황 진(秦) 나라 영토였던 옛 비어 있는(진고공지) 상하장 에 거주하면서,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을 도읍으로 정했다
■ 위만조선은 영토가 1백리 정도인 작은 나라였다
1) 전국시대 연나라가 동호(진번조선)에게 빼앗은 땅은 천여리로 최대 1천 5백리정도이니
직선 거리로 보면 약 9백리 정도가 된다
☞ [출처] 110-2/15[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0.匈奴列傳(흉노열전)
其後燕有賢將秦開, 為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그 후 연나라의 명장 진개가 호(동호)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켰으며, 이때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2) 동호에게 빼앗은 1천여리에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의 5군을 설치했고, 상곡, 요서, 요동은 전방에...
어양, 우북평은 후방에 설치한 것으로 보이기에, 개별 군은 대략 직선거리로 3백리 정도다(약 9백리 / 3군)
☞ [출처] 110-2/15[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0.匈奴列傳(흉노열전)
燕亦筑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以拒胡.
연나라 역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았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에
군을 설치하여 호(동호)를 방어했다.
3) 약 3백리 정도의 전국시대 요동군을 패수를 기준으로 진한 시대 요동군과 요동외요(진고공지 상하장)로
나누었으니 요동외요(진고공지 상하장, 위만조선)는 직선거리는 약 1백리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 [출처] 115-1/2[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5.朝鮮列傳(조선열전)
秦滅燕,屬遼東外徼. 漢興, 為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為界, 屬燕.
(위만조선 위치는) 진시황의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진나라 요동외요(요동군이 바깥을 순찰하는 지역)에 속해 있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그곳(요동외요)가 멀어 지키기가 어려워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정하고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4) 위만이 부근의 작은 읍들을 복속시키니, 진번, 임둔이 복속하였다고 했으니 진번, 임둔도 작은 읍일 것이니,
위만조선 영토가 사방 수천리는 뻥이고 1백리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 [출처] 115-1/2[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5.朝鮮列傳(조선열전)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真番, 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이로써 위만은 그 땅의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부근의 작은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토가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사방 수천리는 뻥이다)
■ 위만조선(진고공지, 요동외요, 상하장) 영토가 1백리인 지도
"2세 원년(기원전 209년) 7월, 빈민가 백성들을 징발하여 수자리로(변방으로) 보내
어양(漁陽)을 지키게 하여 900명이 대택향(大澤鄕)에 주둔하게 되었다."
[출처] 48-01/06[史記(사기)세가(世家)] 권48.陳涉世家(진섭세가)(01)<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
--> 대택향(大澤鄕, 대륙택향)은 대륙택((大陸澤) 근처로 보이니 어양은 대륙택((大陸澤) 부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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