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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모본왕이 AD 49년에 한나라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공격한 미스터리 실체는(?)

 

한나라 태원이 산서성 서남부 임분시인 근거는 한서지리지다.

 

1) 한서지리지에 태원은 태원군으로 치소가 진양인데
    진양은 요임금의 당국으로 표현되어 있으니 도사 유적이 있는 임분시 지역이 한나라 태원군이다

 

☞ 『한서지리지 태원군』

    태원군은 진시황의 진나라가 설치했고, 치소는 진양인데, 옛 시경의 당국이다

    [원문] 漢書地理志 : 太原郡, 秦置, 在晉陽(縣). 晉陽(縣) 故詩唐國.

 

2) 산서성 서남부 임분시(臨汾市) 지역이 한나라 태원군이 된 이유는
      태악산(太嶽山)이 임분시 북동쪽에 있어서 태악산의 근원이라는 의미가 태원(太原)이다

 

3) 고구려 멸망 후에 즉천무후가 태원부를 지금의 산서성 중부 태원시에 설치했고,
    명.청 시대에도 태원부가 이어져서,지금의 태원시라는 이름이 부여된 것이다

 

☞ 『바이두백과 태원부』

    太原府 是古代地区的名称,唐朝武后时期建制,此后建制断断续续,至明清时期才稳定。

     明清时期隶属于山西承宣布政使司,山西行省,府治阳曲下辖州为平定州,忻州,代州,

     岢岚州,永宁州,保德州等。辖区在历代中有所增减,至废除前所辖1州10县。

 

하북성 중북부가 고구려 영토였기에
     산서성 서남부의 임분시(한나라 태원군)을 고구려가 공격할 수 있었다


1) 하북성 석가장시 지역의 호타하 북쪽인
하북성 중북부 지역도 고구려 영토였기에,
    (1) AD 49년 모본왕이 석가장시 남동쪽의 (우)북평군, ,석가장시 남쪽의 어양군을 공격하고,

    (2) 태행팔경의 지금의  정형을 통해 태행산맥으로 통과하여 산서성 양천시의 상곡군을 공격하고.

    (3) 산서성 서남부 임분시의 태원군을 공격한 것이다

 

2) 고구려 모본왕이 AD 49년  한나라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공격한 내용
     삼국사기와 후한서 동이열전으로 교차검증된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모본왕 2년(AD 49년) 봄에 장수를 보내 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

     [원문] 慕本王 二年, 春, 遣將襲漢 北平·漁陽·上谷·大原, 而遼東大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건무 25년(AD 49년) 봄에 고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원문] 建武 二十五年 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3) 고구려  태조대왕이  AD 55년에 
    하북성 중부 석가장시 지역인 요서에 10성을 쌓은 내용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AD 49 모본왕 이전에 석가장시 지역인 요서는 고구려 영토였기에,

    요서 남동쪽인 우북평군과, 요서 남쪽인 어양군을 공격할 수 있었다(삼국사기에 기록은 없지만...)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태조대왕 3년(AD 55년)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군대에 대비하였다.

     [원문] 太祖大王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 하북성 중부 호타하 남쪽에 한나라 요서, 우북평, 어양이 있었다는

    근거는 사마천사기 진섭세가

 

1) 하북성 석가장시 남쪽이 어양인 근거는

     『사마천사기 진섭세가』에 어양을 지키기 위해 900명의 병사를 대택향에 주둔시켰는데,

     대택향의 대택이 한서지리지 거록현 북쪽에 있다는 대륙택이고, 산해경에 나오는 대택이며,

     당태종이 고생한 요수(부양하) 부근 요택이기 때문이다

 

☞ 『사마천사기 진섭세가』

     진시황 2세 원년 7월, 빈민을 징발하여 어양에 수자리를 보내니, 900명이 대택향에 주둔하였다.

     진승·오광이 모두 수자리 차례가 되어, 출발하는 행렬에 편입되어 둔장을 맡았다.

     [원문] 二世元年七月, 發閭左適戍漁陽, 九百人屯大澤鄉. 陳勝, 吳廣皆次當行, 為屯長.

  

☞ 『한서지리지 거록군』

     거록군의 거록현 : 우공의 대륙택이 (거록현)의 북쪽에 있다.

      [원문] 『漢書地理志 鉅鹿郡』 鉅鹿 : 禹貢 大陸澤 在北. 

 

2) 춘추시대 황하를 한나라 사람들은 요수라 했고(춘추시대 황하는 전한시대 황하와 흐름이 다름), 
   춘추시대 황하(하수) 부근인 한나라 시대 요수 부근  전국시대 연나라 도성 계가 있었다.

 

☞ 『한비자 유도』

     연나라 소(양)왕이 하수(춘추시대 황하)를 경계로 계를 도성으로 삼았다. 

      ※ 주) 국(國)을 나라로 번역하면 계가 연나라 전체가 되기에 오역이며,

      국(國)은 도성이며. 『계를 도성으로 삼았다』로 번역해야 함(하수가 연나라 도성 계의 경계)

      [원문] 『韓非子 有度』 燕(昭)襄王以河(水)爲境, 以薊爲國.

 

☞ 『염철론 험고』

     (전국시대) 연나라( 도성 계)는 갈석산에 의해 막히고, 사곡에 의해 끊겼으며,

      요수에 의해 둘러싸였다.

      [원문] 『鹽鐵論 險固』 燕 塞碣石, 絶邪谷, 繞援遼(水).

 

■ 하북성 석가장시 지역의 호타하 북쪽인 하북성 중북부 지역도 고구려 영토였다.

 

1) 하북성 석가장시 지역의 호타하 남쪽에 전국시대 연나라 요서, 어양, 우북평이 있었으니,
    한나라 영토(전한시대 연나라 영토)는 하북성 중부 호타하를 남지 못했다.

 

2) 사마천사기 화식열전과 한서지리지에 

     연나라 북쪽에 사방 2천리의 부여가 북부여다.  북부여를 졸본부여가 이어 받았고,

     졸본부여를 고구려가 이어 받았으니, 호타하 북쪽의 하북성 중북부는 고구려 영토였다 

 

☞ 『사마천사기 화식열전』   

      연나라 북쪽에는 오환(烏桓)과 부여(夫餘, 북부여--> 졸본부여)가 이웃해 있고,

      연나라 동쪽에 예맥조선이 있고, 동북쪽으로 호(동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주) 전국시대 연나라 북쪽에 호(북부여) 가 있었는데 동쪽으로 호가 이동했으니, 

                연나라 동북쪽의 호는 동부여다.

       [원문] 夫燕, 北鄰烏桓 夫餘, 東綰穢貉朝鮮, 東北邊胡.

 

☞ 『한서지리지 연나라』 

     연나라 북쪽에는 오환(烏丸)과 부여(夫餘)가 이웃해 있고,  

     연나라 동쪽에는 진번과 교역으로 이익이 있다

    [원문] 漢書地理志 燕地 北隙烏丸夫餘, 東賈眞番之利.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방 2천 리다.

     [원문] 夫餘在長城之北, 方可二千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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