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의 한나라 제후국인 연나라 사람 위만 이 전국시대 연나라 요동군 상하장 (요동외요, 진고공지, 상하장)에 세운위만 조선은 영토는 1백리 정도였고 조선이라는 명칭을 도용한 짝퉁 고조선이다 ■ 위만조선은 짝퉁 고조선이다 유방의 한나라 제후국인 연나라 사람 위만이 전국시대 연나라 요동군 상하장(진고공지, 요동외요)에 세운 위만조선이기에 짝퉁 고조선이다 ※주) 전국시대 연나라 요동군 = 진시황의 진나라 요동군 + 요동외요(요동군이 바깥을 순찰하는 지역) = 한나라 요동군 + 진고공지 상하장(위만조선) ☞ [출처] 115-1/2[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5.朝鮮列傳(조선열..
■ 삼한을 포함한 고조선 열국의 위치가 한반도다(?)1) 삼한을 포함한 고조선 열국의 위치가 한반도라는 주장은조선 후기 유학자인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다산 정약용 선생(아방강역고)과, 안정복(동사강목) 등 조선 후기 유학자들이 한백겸의 주장을 지지 하였습니다. 2)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한백겸, 정약용, 안정복등의 주장을 이용하여한반도에 삼한을 포함한 고조선 열국이 있었다는 일제 식민사학이 만들어졌습니다 3) 한반도에 삼한을 포함한 고조선 열국이 있었다는 주장으로일제 식민사학의 근간이 된 한백겸의 동국지리지(1615년경 작성)는①삼국지 위서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의 동쪽과 서쪽이 바다로 막혀있다는삼한의 지리적인 주요 특성 하나만을 고려하고,②기자조선과 위만조선(낙랑군)이 북한평양에 있..
■ 고구려 평양성인 장안성 위치 고찰 당고종의 아들 장회태자가 고구려 멸망당시 고구려 평양성은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의 동옥저에 있다고 했고,수서 내호아열전에 평양성인 장안성이 발해만(창해)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동옥저의 위치는 발해만의 진황도시/호로도시 지역이고, 동옥저 서부지역에 고구려 평양성인 장안성이 있었으니고구려 동쪽의 개마대산은 지금의 갈석산이고, 고구려 평양성인 장안성은 하북성 진황도시에 있었습니다 1)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고종의 아들 장회태자가 평양성인 장안성이 동옥저에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주)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둘째 아들인 장회태자(AD 654 ~ 684 )는 고구려 멸망(AD 668년) 당시의 인물로 고구려 평양성인 장안성의..
■ 고구려 수도 이동과 수도 위치 1)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수도는 주몽의 졸본성(BC 37), 유리왕의 국내성(AD 3), 산상왕의 환도성(AD 209),동천왕의 평양성(AD 247), 고국원왕의 황성(AD 343, 평양동황성=평양 동쪽의 황성),장수왕의 평양성(남평양성, AD 427년), 평원왕의 장안성(평양성, AD 586)이다2) 당태종이 편찬 지시한 북사 고구려열전에는 고구려 3경이 국내성, 평양성(장안성), 한성이라고 했는데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고구려 수도에는 한성이 없고 모두 3글자인데 황성(평양동황성=평양 동쪽 황성)만 2글자다황성(黃城)의 의미는 황제의 성이니고구려 수도 황성(평양동황성=평양 동쪽 황성)을 당나라 학자가 한성(漢城)으로 바꾸어 기록한 것으로 본다3) AD 245년(동..
■ 압록수 북쪽 450리에 살수가 있다(수서 우문술 열전) ※주) 수서 우문술열전의每鬥便北 :"싸울 때마다 편하게 북쪽으로 갔다"를--> 북송학자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每戰輒走 : "싸울 때마다 번번이 달아났다"로변형시켰고, 삼국사기에서 수서가 아닌 자치통감 내용을 인용하면서고구려 평양성인 장안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1) 수서 우문설 열전에 수나라 군대가 압록수를 건너오니 을지문덕 장군이 싸울때마다 편하게 북쪽으로 갔고, 살수를 동쪽으로 건넜으니 압록수 북쪽에 살수가 있다 우문술이 후퇴하면서 살수에서 1.5일동안 450리 도망쳐서 압록수에 도착했다 2) 구당서 이적열전에압록수에서 200리 거리에 평양성(장안성)이 있으니수서의 살수를 구당서에서 압록수로 기록한 것이니압록수 지명이 이..
■ 수서의 살수가 구당서의 압록수로 지금의 하북성 난하(灤河)다 1) 수서 우문술열전의 살수가, 구당서 이적열전의 압록수다-.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시 수서 우문술열전에 압록수에서 살수까지 거리가 450리, 살수 동쪽에평양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살수에서 평양성의 거리는 200백리로 추정)-.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시 구당서 이적열전에 압록수에서 동쪽으로 200리 거리에 평양성이 있다고기록되어 있다 수나라 시대와 당나라 시대에 평양성은 같은 곳에 있었기에수서 우문술열전의 살수가, 구당서 이적열전의 압록수다 ☞ 수서와 북사 『우문술 열전』우문술은 9군을 거느리고 압록수에 도착했다 ..., 그리하여 (우문술은) 여러장수들과 (압록)수를 건너그(을지문득)을 추격했다. 당시 문덕은 우문술의 군대에 굶주린 기색이 ..
■ 구당서에 기록된 멸망 직전(AD 600년 경)의 고구려 영토 고찰 1) AD 945년에 완성된 구당서의 고구려 영토 내용은 멸망 직전인 AD600년 경의 고구려 영토를 설명한 것이다 고구려 평양성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신라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면 백제에 이른다고 했으니고구려 위치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가 될 수 없다-. 한반도 북부나 만주에서 동쪽 바다인 동해를 건너면 신라가 일본열도에 있게되고-. 한반도 북부 남쪽에는 바다가 없으며, 만주 요동에서 바다인 요동만을 건너면 백제가 서해바다가 되니 고구려 영토는 하북성 북부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라고구려 평양성인 진황도시에서 동쪽으로 바다는 요하를 가르키고, 남쪽으로 바다는 형수시의 부양하를 카르킨다 따..
【한글 원형(고한글) 발견- 이찬구 박사】 ■ 조선시대 이전에 한글 원형(고한글)이 발견되었습니다1) 춘추시대 고조선인 산융의 화폐인 첨수도에 한글 『돈』자가 쓰여져 있고 2) 북송 학자 여몽정(946 ~ 1011)의 명문 『한요부 타삼오해』 에 고려시대 한글 원형(고한글)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한글 대토론회---세종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이전에도 한글이 있었다? ---한요부 타삼오해의 발견과 고한글 고찰(이찬구 박사)https://www.youtube.com/watch?v=a3H4yXuNByk&t=516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