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고대 갈석산이 지금의 진황도시 갈석산이라는 주장사이비 역사 ( 유사역사학 )

 

■ "사마천 사기 하본기 우임금"에
    우측(서쪽)으로 갈석산을 끼고 춘추시대 황하(해海, 하河)를 따라 낙양으로 갔으니

    갈석산은 춘추시대 황하(하수) 부근인 대륙택(대택) 부근에 있어야 한다
    (석가장시 남쪽의 태행산맥의 산)

    ※주) (1) 고대 황하 하구인 천진시에서 200km(500리) 떨어진
                   진황도시의 지금의 갈석산은 고대 황하 부근이 아니기에 고대 갈석산이 될 수 없다
             (2) 고대 황하에서 200km 정도인 500리 떨어진

                   보정시의 백석산도 고대 갈석산이 될 수 없다

☞ 사마천 사기 하본기(夏本紀) 제우(帝禹)
    조이의 특산품은 짐승가죽 옷인데,
     우측(서쪽)으로 갈석산을 끼고 고대 황하(해海, 하河)를 따라 낙양으로 운송되었다
     [원문] 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海. (☞ "尙書": 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河.)

 

■ "사마천 사기 화식열전"과 AD 90년 경에 편찬된 "한서지리지"에
     연나라 위치는 발갈지간으로 발해(군)과 갈석산 사이라고 했다

     (1) 고대 갈석산 동쪽에 춘추전국시대 연나라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갈석산 동쪽은 발해만이기에 지금의 갈석산은 고대 갈석산이 될 수 없다

     (2) 춘추전국 시대 연나라가 북경지역이라면, 북경 서쪽에 갈석산이 있어야 하기에

          북경 동쪽지금의 갈석산은 고대 갈석산이 될 수 없다

  
☞ 사마천 사기 화식열전
     연(燕) 역시 발해(군)과 갈석산 사이에 있는 도회지이다.
     [원문] 夫燕亦 勃碣之閒一都會也.
 
☞ 한서지리지 연나라(燕地)
     연나라 수도인 계(薊)는 발해(군)과 갈석산 사이에 있는 도회지였다.
     [원문] 薊 勃碣之間一都會也

※주) "사마천 사기"와 "한서"에서 발해군의 하천(강)은
        조선열전의 삼수변氵의 발해(渤海)와 한서의 발해해(勃海海)로 표현되었다

        그 나머지의 발해(勃海)는 산동성 덕주시 지역에 있었던 발해군이다

■ 당나라 이전의 고대 갈석산은 "한서지리지"
    우북평군 려성현 서남쪽의 크다란 산인 게석산(대게석산)으로 고대 갈석산은 1였다

    하북성 중부 석가장시 남부 황현의 장석암이 고대 갈석산이다
    갈석은 비석처럼 넓쩍한 돌이고, 장석은 넓쩍한 돌이니 같은 의미다

    중국 당나라 학자들이 사마천 사기를 주석하면서
    갈석산이 2개라고 뻥을 쳤다(좌/우 갈석산)

    그래서
    당나라 시대에 지금의 진황도시에
    고구려에 있다는 갈석산을 만들고 갈석산으로 이름 붙였다

    원래 고대 중국 학자들이 지금의 갈석산을 개마대산으로 불렸고

    우리 선조들은 갈사국(갈사부여)의 돌로 된 산이라서
    갈석산으로 불렸다고 추정된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뻥이 심하니, 당나라 이후 학자들이
    동성 무체현 황하 우측에도 갈석산을 만들었다(당나라 이후에) 
 
 
☞ 한서지리지 우북평군 려성현
      [원문]
驪成 : 大揭石山在縣西南. 莽曰揭石
      려성현 : 크다란 산인 게석산( 대게석산)이 려성현의 서남쪽에 있다.
      왕망이 (갈석碣石을) 게석(揭石)으로 고쳤다
   
지금의 진황도시 갈석산이 개마대산인 근거
 
    "사마천 사기 평준서"에
    창해군이 설치된 연제지간(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동예=예-예맥의 위치이니 하북성 중동부 창주시 지역이다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에
    동예=예=예맥 북쪽에 고구려(사방 2천리)와 옥저가 붙어 있으니
    고구려는 하북성 북부, 옥저(동옥저)는 진황도시 동쪽의 요서회랑이다  
 
    (1) 개마대산은 하북성 북부(고구려)와 요서회랑(동옥저) 사이로  
          ▶ 개마대산은 지금의 진황도시의 갈석산이다 
 
    (2) "삼국지 위서동이전 동옥저"에
          처음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는데,
          이맥의 침입으로 현도군 치소를 고구려현 서북으로 옮겼고
          옥저를 낙랑군에 속하게 하여 단단대령 동쪽에 영동7현을 설치했다  
           ▶ 단단대령은 옥저(동옥저) 요서회량 서쪽의 산맥이니 노로아호산맥이다  
 
       그런데
       단단대령 동쪽의 영동
       지금의 강원도 대관령 동쪽의 영동 주장국민들을 속이는 것이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濊"( = 동예東濊 = 예맥 = 맥)
     한무제 원삭 원년(B.C.128)에 예(濊)의 임금(君) 남여(南閭)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구(萬口)를 이끌고 요동군에 귀속하였으므로,
     한무제는 그 지역(예=동예=예맥)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원문] 元朔元年(B.C.128), 武帝年也. 濊君南閭 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 사마천 사기(史記) 卷三十평준서(平準書)
     팽오가(彭吳賈) (위만)조선을 멸하고자 하여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제지간(燕齊之間,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쓰러질듯 소란스러웠다.
    [원문]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閒靡然發動.

 

진황도시 갈석산 서쪽을 갈사국(갈사부여)로 추정하는 근거

 

"사마천 사기 화식열전"에

(1) 北鄰烏桓夫餘 : 연나라 북쪽에 부여(북부여-->졸본부여)가 있다

(2) 東北邊胡 : 연나라 동북쪽은 호(동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1) 연나라 북쪽인 북경지역에는 북부여가 있었고

    북부여를 계승한 졸본부여는 보정시에 있었으니  

    북경지역과 보정시 지역은 연나라 북쪽이다  

 

2) "삼국유사"에

    해부루가 북부여에서 북부여 동쪽인 가섭원 으로 이동하여 동부여가 되었다고 했으니  

    북경 지역의 북부여 동쪽인 당산 존화시(遵化市)에 동부여가 있었으니

    당산 존화시(遵化市)는 연나라 동북쪽이다

 

3) "삼국사기"에

    동부여 대소왕이 전사하자 대소왕의 종제가 갈사국을 차지하여 갈사부여를 세웠다

    존화시(遵化市)의 동부여 동쪽, 지금의 진황도사 갈석산 서쪽인

    당산 천안시(遷安市)와 노룡현 지역이 갈사부여로 추정된다

  

■ 황하 흐름의 시대별 변천

[출처] 바이두 백과의 시대별 고대 황하 흐름 --> 黄河故道图片_百度百科 (baidu.com)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