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본서기에 임나는 고대 일본(야마토 왜)의 식민지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임나가 가야』라는 내용은 없다. 이것은 펙트다) ■『임나일본부』와 『임나일본부설』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1) 『임나일본부』는 일본천왕이 일본신,일본경 등을 파견하는 일본천왕의 지방 통치기구다(안라일본부, 일본부가 따로 나타나는데 일본부는 조선총독부의 총독부와 비슷한 용어다) 2) 『임나일본부설』은 임나가 가야라고 주장하여 한반도 남부가 고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이다 3) 침미다례, 기문, 대사, 다라, 임나, 안라, 가라, 남가라, 탁순 등은일본천왕에 속한 나라이니 고대 일본의 식민지인 나라들이다(임나4현인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는 고대일본 식민지인 임나의 4개 현이다) ■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는 가..

1. 진경대사 탑비문은 진경대사 조상(선조, 가까운 조상)은 임나왕족이고, 먼조상(임나왕족의 선조)인 흥무대왕(김유신)은 재상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 재상의 집안에서 태어난 흥무대왕(김유신) 후손 중에 임나왕이 있었고, 임나왕(족) 후손이 진경대사로 기록된 것이다 (김유신은 가야왕족의 후손으로 가야왕족도 아니고, 임나왕족도 아니다.) 2. 대학역사 교수들은 한글 단어의 의미도 모르는지 이상하게 해석한다 「조상」과 「먼 조상」을 같이 보아서 먼 조상 흥무대왕(김유신)을 가야 왕족으로 오해하여 임나왕족으로 보고 임나가 가야라고 엉터리 주장을 한다 (1) 탑비비문은 「조상(선조, 가까운 조상)」과 「먼 조상(원조)」는 의미도 다르기에 --> 같은 의미라면 임나왕족을 조상(선조), 흥무대왕(..

■ 임나가 가야라는 주장이 임나일본부설이다 일본서기에 임나가 야마토 왜의 식민지였으니 임나가 가야라는 주장은 일본서기에 의해 야마토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된다 한일 역사 학자들이 임나일본부는 없었다라고 주장하고 일본 학계 일부에서 일본의 가야지배설을 폐기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임나가 가야라고 주장하면서 말로만 지배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고 임나일본부설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다 임나가 가야면 일본서기에 의해 고대일본(아마토왜)가 한반도 남부인 가야를 지배한 것이 되기에 일본 학자들이 잘모르는 우리국민들에게 사기치고 있다고 봐야 한다 ■ 임나가 가야라고 주장한 최초의 학자는 서울대 이병도 박사의 스승인 일제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키치 다 ■ 일제가 만든 식민사학은 무엇을 말하는가? 임나가 가야고, 낙..

■ "임나는 가야"라는 주장(임나가야설)은 조상의 영토와 역사를 일본에 팔어먹는 매국사학이다 ※주) "391년 왜나라가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 "왜나라 왕은 한반도 남부의 군사적 지배권을 인정 받았다' 고 기술하고, 일본서기 임나의 다라국이 경남 합천이라는 임나 일본부설의 근거인 임나 7국을 한반도 남부로 비정한 지도를 일본 역사교과서에 기술하여 임나 일본부설을 일본학생들에게 가르키고 있으니.. "임나는 가야"라는 주장은 조상의 영토와 역사를 일본에 팔어먹는 매국사학이다 ■ 임나가 가야라는 주장(임나가야설)은 역사학자들이 고대문헌을 엉터리로 해석한 국민을 속이는 기만행위이고 , 역사학자들의 뇌피셜이며, 역사학자들이 소설을 쓴 것이다 양직공도, 광개토태왕비, 삼국사기 강수열전, 진경대사 탑비문에 ..

■ 갈석산, 요수, 전국시대 연나라 도성 계(薊)의 위치가 중요한 이유1.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갈석산에서 시작됐다는 통설 사마천 사기 하본기에서 당나라 학자 사마정(AD 656년 - 720년)이 갈석산에 대해 색은에서 주석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태강지리지(AD 280년 ~ 289년)가 말했다」 는 내용으로 장성이 진시황의 만리장성으로 갈석산에서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발생했다 [원문] 史記 卷二 夏本紀 第二 【索隱】 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따라서 태강지리지의 장성이 진시황의 만리 장성이라는 근거도 없지만 고대 갈석산을 찾아면 진시황의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을 찾을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 ..

■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한국고대사를 풀 ◐열쇠◐가 숨어있다 ※주) 낙랑군과 위만조선, 연나라 장성, 요동군, 요서군이 하북성 중부인 석가장시와 형수시에 있었다고 서기전 91년 완성된 사마천 「사기」와 서기 90년 경에 완성된 「한서지리지」가 신호를 보내고 있다 따라서 사마천 사기의 지리적인 관점에서 해석과 고찰이 중요한 이유다 ■ 춘추시대 연燕 제濟 진秦 등 제후국의 봉지는 100리(40km)를 넘지 않았고 고조선 땅을 빼앗기 전에는 100리(40km) 정도가 연燕나라 영토로 추정된다 1) 기원전 134년에 주부 언 (主父偃, ? ~ 기원전 125년?)이 황제(한漢무제)에게 권유하여 말했다. “옛날(춘추전국시대)의 제후들은 봉지가 1백리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강약의 형세로 통제하기 수월했습니다" [출..

■ 한무제 당대 문헌인 사마천사기 화식열전에 한(漢)나라가 황하 주변의 크지 않은 나라였다고 기록되어 있다BC 91년 한무제 시대에 편찬된 사마천 사기 화식열전에 관중(장안, 서안) 평야가 천리이며 한나라 영토(천하)의 3분의 1(1/3)이라고 되어 있으니한나라는 섬서성과 하남성을 차지한 지금의 황하 주변 지역의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고 기록한 것이다. ☞ 『사마천 사기(史記) 卷百二十九 「화식열전(貨殖列傳)」』 관중(關中)은 견(汧)과 옹(雍)에서 동쪽으로 황하와 화산(華山)에 이르기까지 기름진 땅과 비옥한 들판이 사방 천 리에 펼쳐져 있다. 그리하여 관중의 땅은 천하(한나라)의 3분의 1에 인구는 10분의 3에 지나지 않지만 그 부유함을 따져보면 10분의 6을 차지하고 있었..

■ 진시황의 진나라 북쪽(하북성, 산서성, 오르도스)에는호(胡)로 불리운 고조선인 북부여가 있었다1. 중국인은 염소 수염인데, 구렛나룻 수염 호胡자이니 호胡는 구렛나룻 수염이 있는 고조선 사람을 나타낸 것이다 (1) 정사 삼국지 위서동이전 예조에서 고조선을 호(胡, 구렛나루 수염 호)라고 했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설치하니 이때부터 호(胡, 고조선)과 한(漢,한나라)가 구분되기 시작하였다(自是之後, 胡·漢稍別) (2) 전국시대 고조선은 장단경(대부여) 시대였고 진시황의 진나라 시대 고조선은 해모수의 북부여였고 전한시대 고조선은 동명왕의 졸본부여다 2. 전국시대 연나라와 진시황의 진나라 북쪽인 하북성 중북부와 산서성 중북부 ..